|
추적 |
1997년06월26일 제 163호
|
|---|
(사진/79년 5월 신민당 당권을 놓고 맞붙은 김영삼씨와
이철승씨의 대결은 합종연횡으로 승부가 판가름났다.
당시 김영삼씨는 김대중씨의 지지로 당권을 잡을 수 있었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는 몇차례 역사적인 합종연횡의 기록이 있다.
그 원조는 70년 1월26일 열린 신민당 당수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 유진오 총재가 신병으로 당무를 수행하기 어렵게 되자 유진산 부총재가 당권을 인수하기 위해 강행한 이 대회에서 비주류인 정일형 이재형 두 부총재가 ‘반진산연합’을 구축해 유 부총재에게 도전한 것이다. 이들은 “개인적 인 이미지가 나쁜 유진산이 야당 당수가 돼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내세 워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을 경우 표를 많이 얻은 후보를 2차 에서 밀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1차 투표결과 유진산 286표, 이재형 192표 , 정일형 125표로 과반수 득표자가 없자 정 부총재는 사전 약속에 따라 2 차 투표 직전 이 부총재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하지만 결과는 유진산 의 승리로 끝났다. 이들의 연합에도 불구하고 전당대회 직전 당세 확장을 위해 입당한 이재학 손도심 등 자유당계 인사들과 이철승 윤길중 등 재야 세력들이 유진산을 지지해 버린 것이다.
같은해 9월29일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신민당 대통령 후보지명대회는 성 공한 합종연횡의 전형이다.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등장한 김영삼 김 대중 이철승씨와 유진산 총재가 경쟁한 이 대회는 그야말로 물고물리는 접전이었다. 이들 40대는 유 총재의 출마를 저지하기 위해서 일단 공동보 조를 취했다. ‘40대 기수론’에 대해 “구상유취” “정치적 미성년자” 라는 표현을 동원하며 맞선 유 총재를 비롯한 양일동 정성태 등 당내 노 장세력에 대항해 ‘단일화 모색’이라는 전략으로 대응한 것이다.
이들의 반발에 밀린 유 총재는 전당대회를 이틀 앞둔 9월25일 자신의 불 출마를 전제로 40대 단일후보 지명권을 요구했고 이 불의의 기습에 이들 은 갈라섰다. 김영삼 이철승 씨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김대중씨가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유 총재가 김영삼씨를 당의 공식후보로 추천하자 다시 한 번 반전됐다. 1차 투표에 참여한 이철승씨의 지지자들이 유 총재의 선택 에 불만을 품고 대규모로 무효표를 던진 것이다. 결국 1차투표는 재적 대 의원 885명 가운데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무효 82표로 과반수 득 표자 없이 끝났다.
그리고 2차 투표를 앞두고 김대중씨와 이철승씨는 11월 전당대회에서 ‘ 반진산 연합지도체제’를 형성해 유 총재의 당권에 공동 도전하기로 전격 합의한다. 결국이씨의 지지를 등에 업은 김대중씨가 458표를 얻어 410표 를 얻은 김영삼씨를 상대로 극적인 역전의 드라마를 펼쳤다.
또한번의 역사적인 합종연횡은 79년 5월30일 총재 선출을 위한 신민당 전 당대회에서 이뤄졌다. 중도통합론을 내세워 유신정권과 협력노선을 취했 던 이철승씨와 대결노선을 견지한 김영삼씨가 맞붙은 이 대회에는 신도환 김재광 박영록 이기택 조윤형 등 모두 7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그러나 전 당대회를 하루 앞둔 29일 김재광 박영록 조윤형 등 세 후보가 김영삼씨에 대한 지지선언과 함께 전격사퇴한다. 김대중씨가 이들에게 후보사퇴와 김 영삼 지지를 호소한 결과였다.
그러나 1차 투표 결과 이철승 292표 김영삼 267표로 이씨가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과반수에 미달된 상황이었다. 결국 2차 투표를 앞둔 2시 간5분 동안 양 진영은 막후에서 숨막히는 합종연횡을 시도해 김씨는 1차 에서 92표를 얻은 이기택씨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이씨쪽 또한 87표 를 얻은 신도환씨의 지지를 얻어냈다. 투표결과 과반수인 376표보다 2표 많은 378표를 얻은 김씨가 이씨를 11표차로 따돌리고 2년6개월 만에 제1 야당 총재로 복귀했다.
신승근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