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읽기
1997년06월26일 제 163호 한겨레21

인류를 위협하는 감염병

황상익/ 서울의대, 의학사 및 의료윤리학

지난 4월7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세계 보건의 날’을 맞아 “감염병 시대 다시 오다 ­ 우리 모두 관심을, 우리 모두 대응책을”이라는 표어 를 내걸고 모든 나라가 감염병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일 것을 촉구했다. 감염병은 인류가 탄생한 이래 인류를 괴롭혀 왔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감염병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보다 훨씬 길어 지상의 모든 생물체가 수억 년 동안 감염병에 희생당해 왔다. 그런데도 인류는 감염병의 정체를 제대 로 알지 못한 채 감염병에 걸려 고생하고 죽는 것을 거의 운명처럼 감수 해 왔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후반 파스퇴르와 코호 등에 의해 감염병 가운데 많은 것이 병원성 박테리아(병원균)에 의해 생긴다는 것이 확인되고 20세기 들 어서는 세균 이외에 바이러스와 곰팡이와 리케챠 등도 감염병의 원인이라 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인류는 감염병 퇴치에 자신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미생물 병원설(病原說)’이 확립된 1880년대 이래 여러 가지 항독소와 예방백신이 개발되고(두창 퇴치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우두는 이보다 한 세기 전에 도입되었다) 1940년대부터는 페니실린과 스트렙토마이신 등 각 종 감염병에 대해 특효를 나타내는 여러 항생제가 생산되면서 감염병은 그리 어렵지 않게 정복될 것으로 낙관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1970년대에 두창이 완전히 정복되는 등 많은 감염병이 그 위세를 잃게 되었다. 현대 의학이 짧은 기간 동안 수많은 개가를 올려 왔지만 그 중에서도 감염병 퇴치를 으뜸가는 것으로 평가할 만한 성과를 거둔 셈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러한 성과와 ‘때이른’ 낙관을 뒤엎는 사태가 벌어 졌다. 1970년대 후반 이래 C형 간염, 에볼라형 출혈열, 에이즈를 비롯하 여 감염력이 매우 높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30여종의 감염병이 새로이 발 견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 감염병 대부분에 대해 아직 뚜렷한 치료법을 찾지 못하고 있으며 예방백신 또한 개발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와 함께 말라리아와 결핵 같은 ‘후진국성 감염병’도 최근 선진국에서조차 다시 기승을 부릴 채비를 하고 있다. 더욱 당황스러운 일은 항생제에 대 해 내성을 갖춘 새로운 균주들이 더욱 무서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 이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 93년 방글라데시에서 발생한 새로운 콜레라(O- 139)와 유럽과 일본 열도에 휘몰아쳤던 병원성 대장균(O-157) 식중독 사 건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10여년 사이에 많은 감염병이 새로 확인되었다. ‘ 농촌 괴질’이란 이름으로 70년대부터 농민들을 주로 괴롭혀 온 유행성 폐출혈열(렙토스피라증), 그리고 발진과 함께 고열을 동반하는 쓰쓰가무 시병이 대표적이다. 또 20여년 이상 발생하지 않아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 었던 토착성 말라리아가 93년 무렵부터 휴전선 일대의 군인과 민간인에서 발생하였다.

세계보건기구가 ‘새로운 감염병 시대’를 경고하는 것은 이같은 배경에 서 나온 것이다. 정말로 과거와 비슷한 감염병 시대가 다시 도래할지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핵전쟁 등으로 세계질서가 완 전히 붕괴되기 전에는 14세기에 전유럽 인구의 1/3 가량을 몰살시킨 페스 트(흑사병) 대유행과 같은 전인류적 ‘사태’가 벌어질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세계적 규모는 아니더라도 한 나라와 사회가 그와 비슷한 피해를 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소련의 해체와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그 지역에 나타난 감염병 창궐은 그러한 가능성을 확인하기에 충분하다. 그보다도 내전에 휩싸인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사정은 그러한 위험을 더 욱 잘 나타내 준다.

혹시 그러한 것이 우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먼나라의 일이라고 생각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결코 남의 일이라고 방관하거나 안심 할 수 없는 사태가 우리의 바로 곁에서 벌어지고 있다. 자연적 재해에서 기인하였든 사회체제 때문에 발생하였든 북한동포들은 지금 극도의 기아 에 시달리고 있다. 기아는 결코 기아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기아 자체 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무서운 피해가 기아로 인한 질병, 특히 감염 병이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지속될 경우 북한 사회에 만연될 감염병은 휴전선 이북에만 머물지 않을 것이다. 군대의 침략보다 더욱 무서운 것이 감염병의 침입이라는 사실은 인류사에서 거듭 확인된 바이다. 기아에 허 덕이는 북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동포로서 같은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도 리이지만 우리 자신과 우리의 어린이들, 그리고 그 동안 피땀 흘려 건설 한 우리 사회를 끔찍한 감염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지혜로운 조치이기 도 한 것이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26일


커버스토리 포커스 문화시대 특집 지난호 전체보기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