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1997년06월26일 제 163호 한겨레21

권투인 김기수

(사진/챔피언이 되는 순간. 66년 이탈리아의 벤베누티를 판정승으로 누르면서 그는 `한국 최초의 권투 세계챔피언'으로 기록됐다.)

챔피언의 죽음은 예견돼 있었다. 암세포가 이미 그의 몸을 야금야금 갉아 먹고 있었다. 의사는 잘하면 6개월 정도 살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챔피언 은 인생의 마지막 라운드에서 병마의 강펀치를 맞고 휘청거리고 있었다. 혼신의 힘으로 주먹을 내지르며 달려들었지만 이미 승부는 기울어 있었다 . 그리고 마침내 복부를 파고드는 적의 피니시 블로우. 한국 최초의 프로 권투 세계챔피언 김기수(향년 59)는 그렇게 쓰러졌다.


개구쟁이, 악바리가 되다

김기수는 60년대 최고의 스포츠 영웅이었다. 당시 허리띠를 졸라매고 경 제발전이라는 무지개를 쫓던 국민들에게 그는 희망의 화신이었다. 주먹 하나로 세계를 정복한 그의 쾌거는 인간승리로까지 포장됐다. 그가 유복 자요 38따라지로 가난의 설움 속에서 자랐기에 그건 장엄하기조차 했다. 숱한 젊은이들이 그의 뒤를 이어 사각의 링에 뛰어들었다. 징그러운 가난 을 때려눕히기 위해서. 그 비장했던 신화가 이제 무덤에 묻혔다.

1966년 6월25일 장충체육관. WBA 주니어미들급 세계타이틀전 15라운드가 막 끝났다. 김기수는 코너에 앉아 가쁜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채점결과를 발표하는 링아나운서의 목소리는 하늘의 심판처럼 쩌렁쩌렁했다. 한국 부 심과 이탈리아 부심은 각각 도전자와 챔피언의 우세를 매겼다. 이제 주심 의 채점만이 남았다. 챔피언의 점수는 68. 김기수는 숨을 멈췄다. “칠십 ….” 링아나운서가 입을 떼는 순간 체육관은 온통 함성에 휩싸였다. 그 날 김기수의 주먹신화는 화려한 꽃망울을 터뜨렸다.

김기수는 어렸을 때 동네에서 알아주는 개구쟁이였다. <북청물장수>라는 시로 유명한 함남 북청의 처녀들은 모두 그의 희생자였다. 말만한 처녀들 이 머리에 이고 다니던 옹기 물동이는 죄다 그의 새총에 깨졌다. 철부지 소년은 누나들이 엉엉 우는 모습을 보고 깔깔거리곤 했다. 친구들이 제기 차기나 말타기를 하다 초가집 흙굴뚝을 무너뜨려도 집주인들은 그의 어머 니만 들볶았다. “기수 가가 우리집 굴뚝 쓰러뜨렸지비.”

전쟁은 그런 개구쟁이를 악바리로 만들었다. 신창초등학교 5학년 때 6·2 5를 맞은 그는 돛단배에 몸을 싣고 38선을 넘었다. 어머니가 치안대원들 에게 밥을 해준 게 빌미가 되어 공산당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다. 포항에 서 미군화물선으로 갈아타고 여수에 닿은 그는 혹독한 생활전선에 뛰어들 어야 했다. 양담배와 신문을 팔면서 살림을 도왔다. 하루 평균 양담배를 10갑 정도 팔았다고 하는데, 그 돈으로 쌀 닷되를 사면 끝이었다.

여항중 2학년 때 처음으로 권투라는 운동이 있다는 걸 알았다. 시민극장 특설링에서 벌어진 군 대항 학생선수권전이었다. 관중들의 함성과 선수들 의 투지에 소년은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소년은 시합이 끝나자마자 여수 에서 하나뿐인 권투도장으로 달려갔다. 학교를 마치면 양담배와 신문을 판 뒤 체육관으로 내달렸다. 그의 주먹은 금세 빛을 발했다. 펀치 한방에 샌드백이 시계추처럼 흔들렸고, 스파링 파트너는 고개를 꺾은 채 주저앉 았다. 그는 이미 도장의 챔피언이었다.

도장에 나간 지 3~4개월 뒤, 그는 여수대표로 링에 섰다. 그리고 승승장 구. 그의 주먹에 상대방은 여지없이 나가떨어졌다. 57년 광주에서 열린 전국학생선수권대회에선 국가대표 선수들도 무너뜨렸다. 그의 KO 행진은 당시 권투명문이던 서울 성북고에 픽업되는 계기가 됐다. 그는 훗날 서울 역에 내렸을 때의 감회를 이렇게 회고하곤 했다. “서울역은 과연 으리으 리했다. 역전에서 시발택시를 타고 성북동에 가는 동안 내내 떨었다. 장 래에 대한 벅찬 기대와 불안감으로.”

김기수의 훈련은 지독했다. 지금의 북악스카이웨이를 거쳐 북한산 곤돌바 위까지 약 15리를 매일 뛰었다. 다른 선수들은 평지를 달렸지만 그는 끝 까지 산길을 고집했다. 링에서 절대 쓰러지지 않는 하체를 만들기 위해서 였다. 그때 그 산길에서 한 야구선수를 만났다. 백인천이었다. 2~3년 뒤 고교야구를 석권했던 경동고의 4번타자도 하체단련을 위해 매일 산길을 달렸던 것이다.


‘무서운 조센징’으로 떠올랐지만…

(사진/그는 간암 말기로 이미 시한부 생명이었다. 사각의 링에서 강펀치를 휘두르던 그도 병마 앞에선 무력했다. )

그는 링에서 패배를 몰랐다. 58년 국가대표선발전 웰터급에서 우승하면서 도쿄아시안게임 출전권을 얻었다. 그리고 아시아의 왕자가 됐다. 중량급 으로서는 한국권투 사상 최초의 국제대회 우승이었다. 이어 대만에서 열 린 동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마추어 전적 87승 이라는 무패행진은 그칠 줄 몰랐다.

그러나 그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60년 로마올림픽에서 그는 2회전을 넘 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난생 처음 겪은 패배였다. 그때 상대가 훗날 세계타이틀전에서 만난 벤베누티였다. 벤베누티는 이탈리아의 우승후보답 게 빠르고 강했다. 김기수의 주먹은 턱을 노렸지만 번번이 허공을 갈랐다 . 마지막 수단으로 배를 노렸지만 벤베투티는 허리를 뒤로 빼며 잘도 피 했다. 김기수가 생전에 완패를 인정한 유일한 시합이었다.

프로로 뛰어들었다. 아마추어 무대를 떠난 그는 오직 돈을 향해 뛰었다. 62년 데뷔전에서 한국웰터급 챔피언 이안사노를 7회 KO로 눕히고 일본으 로 날랐다. 그는 곧 무서운 조센징으로 떠올랐다. 일본 선수를 상대로 KO 주먹을 날리며 매운맛을 뽐냈다. 재일동포들은 그를 통해 이국의 설움을 풀었다. 그때 프로레슬러 역도산을 만나 역도산 문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시합이 열리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조센징의 돌주먹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 설상가상으로 역도산마저 괴한의 칼에 숨졌다. 그는 보따리를 쌀 수밖 에 없었다.

그의 세계타이틀전은 실로 국가적 행사였다. 당시 벤베누티는 대전료로 5 만5천달러를 요구했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막 2백달러를 넘은 시절 이었다. 그는 이기면 5백만원, 지면 대전료를 한푼도 받지 않기로 했지만 막상 챔피언을 불러들일 돈이 없었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그를 불렀다 . “이길 자신 있어요?” 그는 “젖먹던 힘까지 다하겠습니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어디론가 전화 를 걸었다. 대전료는 결국 정부에서 나왔다.

당시 김기수는 주먹을 다쳐 치료를 받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등뼈는 노 인의 것처럼 허약했다. 어렸을 때부터 무거운 짐을 들어 척추가 노화했다 는 게 당시 서울대학병원의 진단이었다. 그래도 그는 링에 섰다. 그의 승 리를 점치는 사람은 드물었다. 7 대 3이라는 불리한 예상이 나돌았다. 그 는 움직임이 빠른 벤베누티를 치고는 껴안고, 다시 치고는 껴안는 히트 앤 클린치 작전으로 공략했다. 그날 그는 피오줌을 쌌다.

그는 프로전적 49전45승(16KO) 2무2패로 14년 권투인생을 마감했다. 3차 방어전에서 이탈리아의 산드로 마징기에게 판정패하면서 그의 시대도 저 물기 시작했다. 프로에 입문한 뒤 최초의 패배였다. 그는 훗날 “당시 대 전료로 5만5천달러를 받아, 나라에 진 빚을 갚았으니 속이 후련하다”고 말하곤 했다. 6개월 뒤에는 일본 선수에게 동양타이틀마저 빼앗겼다. 그 는 그 타이틀을 4개월 만에 되찾고 미련없이 글러브를 벗었다. “자식들 에게 패배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아버지의 마지막 고집이었 다.


인생에 있어서도 챔피언

그의 자식사랑은 유별났다. 그는 가난하게 산 탓인지 절약정신이 몸에 배 어 있었다. 꼭 필요한 돈이 아니면 쓰지 않았고, 평소에도 근검했다. 그 러나 자식에게만은 예외였다. 그는 챔피언이 된 뒤 아이들이 그릇이나 유 리창을 깨뜨려도 야단을 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집은 셋방이 아니고 우리집이니까 마음껏 소란을 피워도 괜찮아”라고 오히려 아이들을 두둔 할 정도였다.

은퇴 이후 그는 사업가로도 성공했다. 매맞고 피오줌을 흘리며 번 돈을 허투로 쓰지 않은 덕이었다. 성북동에 집을 마련하고, 후배를 양성하기 위해 권투도장을 차리기도 했다. 명동에 챔피온이라는 다방을 열었고 4층 짜리 빌딩도 샀다. 그는 언제나 “사각의 링은 냉정하다. 하지만 링 밖은 더욱 비정하다”고 말하곤 했다. 맨주먹으로 가난의 설움을 날려버린 그 는 인생에 있어서도 챔피언이었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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