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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 |
1997년06월26일 제 1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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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은 더위에 지친 어미암퇘지를 향해 마구 덤벼들었다. … 발악하 는 돼지 주변을 돌며 미친 듯이 소리지르며 나무창을 찔러댔다. 돼지 등 에 올라탄 한 소년의 창이 깊숙이 돼지의 목을 찔렀고 돼지는 외마디 절 규와 함께 쓰러졌다. 재크는 목을 베었다. 뜨거운 피가 튀어올랐다. 재크 는 돼지의 목을 긴 장대에 꽂아 깃발처럼 세웠다.” 한총련 사태를 지켜 보며 문득 떠오른 것이 지난 83년 노벨상을 수상한 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이었다. 그의 노벨상 수상 시점은 전두환체제가 야만의 정점을 달리 던 때와 일치하는 것이어서 당시 문학계에 적잖은 뒷얘기를 낳았다.
하필이면 이때 <파리대왕>에 생각이 미치는 걸까. 편협하고 무지한 연상 일까 아니면 학생들이 미쳐버린 것일까.
소설은 미구에 닥쳐올 게 확실한 핵전쟁을 피해 소년 수십명을 남태평양 의 한 섬으로 피난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소년들이 탄 비행기는 그러나 (적국의) 공격을 받아 한 무인도에 불시착한다. 소년들은 문명국 출신답 게 처음엔 자그마한 의회를 구성해 사냥이나 음식분배 등 생존방법을 결 정하기로 하는 등 질서정연하게 공동생활을 꾸려나간다. 그러나 구조가 절망적임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고 일단 절망에 빠지자 그때까지 지켜왔던 조직적이고 합리적인 생활을 포기하게 된다. 고립의 공포감과 구조가 불가능하다는 절망감은 이들에게서 이성과 질서를 박탈 하고 이들을 야만으로 내몬 것이다. 돼지잡기는 야만의 극적인 표현이었 다. 돼지잡기에 충격을 받은 랄프 등 3명의 소년은 동료들의 야만적 행동 에 항거한다. 그러나 이들 중 2명은 다른 소년들에 의해 살해되고 나머지 한명은 쫓긴다.
2차세계대전 때 전투용 잠수함에서 복무했던 저자는 인간의 본성을 ‘벌 이 꿀을 만들 듯 악을 만드는’ 것으로 보았다. 문화나 사회관습이란 이 런 공격적이고 야만적인 본성 때문에 언제든 붕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2차대전이라는 극한을 경험한 저자가 또다시 3차세계대전이라는 피 할 수 없어 보이는 전망 속에서 살던 절망적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물론 골딩의 이런 인간관에 동의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에 의해 저질러지고 또 저질러질 수 있는 최악의 폭력 속에서 이런 인간관의 가능성마저 부인하는 사람은 드물다.
한총련을 주도해온 학생들은 그들이 생명처럼 지켜왔던 이념을 현실 속에 서 부정당하고 있다. 행동방식은 반사회적 혹은 ‘이적’으로 낙인찍혔다 . 공권력은 그들에게 완전한 항복을 요구하며 섬멸전에 나섰다. 언론은 물론 여야정치권도 벼랑 끝에 선 그들을 뒤로 떠민다. 게다가 한총련 주 도세력은 ‘내부의 적’과 끊임없는 싸움을 벌여야 한다. 물론 그들이 자 초한 측면이 크다. 그러나 아무런 출구가 없는 자폐적 상황 속에서의 충 돌. 소설 속에서 소년들은 다른 두 소년을 살해했다.
필자가 <파리대왕>에서 주목하는 것은 폭력이 인간의 본성이냐 아니냐에 있지 않다. 오히려 공포와 절망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파괴한다는 < 파리대왕>의 역설에 있다. 한총련의 과오는 분명하다. 그들이 벌인 싸움 의 파괴적인 결과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치명적인 ‘인간의 파괴’는 앞으로 더욱 강화될 고립과 절망, 그리고 이로 인한 자폐적 공간 속에서 저질러질 것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일본의 적군파는 여전히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다. 소설 속에서 어른들이 랄프를 살해한 재 크에게 돌을 던지지 못하는 것처럼 적군파는 일본인들에게 크나큰 회오의 상처로 남아 있다.
한겨레21 편집장 곽병찬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