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동하는 재벌 |
1997년06월26일 제 163호
|
|---|
(사진/소유주가 있는 상태에서 소유-경영 분리를 단행한 예로는 30대그룹 중 대림이 유일하다. 직원들을 격려하는 이준용 명예회장.)
‘재계의 `기인’ 이준용(59) 대림그룹 회장이 ‘큰일’을 냈다. 지난 6 월3일 그룹 회장자리를 전문경영인인 김병진 그룹 부회장에 넘기고 자신 은 명예회장으로 물러앉은 것이다.
스스로 왕관을 벗어던진 ‘용기’
이 명예회장이 2선 후퇴 결심을 언제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룹 안에서 이를 사전에 알고 있었던 사람은 극소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회장 이 전문경영인의 두축인 김병진, 이정우 두 그룹 부회장과는 사전에 의논 을 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6월3일 사장단회의에서 발표가 있기까지 전혀 눈치를 못챘다.” 그룹 기획조정실 관계자는 발표가 있은 지 며칠이 지났건만 이 회장이라는 호칭을 여전히 쓸 정도로 아직 실감이 안 난다는 표정이다(사실 김병진 신임회장의 정식 취임일은 오는 7월1일 이다).
재벌랭킹 15위의 대림그룹을 이끌어 온 이 회장의 갑작스런 퇴진 배경은 무엇일까. 재벌2세 총수들이 사세나 경영능력은 돌아보지 않고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가 줄초상을 치르고 있는 최근 상황에서 자신의 왕관을 스스로 벗어버린 이 회장의 행동은 대단한 용기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룹 총수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골육상쟁도 마다않는 우리 재계 풍토에서 신선하기까지 하다. 30대그룹에서 전문경영인체제가 등장하기는 기아그룹 에 이어 두번째. 그러나 개인 대주주가 없는 기아와 대림은 경우가 다르 다. 오너가 있는 상태에서 소유-경영 분리를 단행한 경우로는 대림이 유 일한 케이스인 것이다. 그의 퇴진이 몰고온 충격과 신선함이 큰 만큼 그 속사정에 대한 항간의 궁금증도 크다. 이 회장의 건강에 무슨 문제가 생 긴 것 아니냐는 이야기부터 자금난 등 그룹의 위기타개를 위해 승부수를 띄운 것이라든지, 가족 내부에 불화가 심각하다는 말에 이르기까지 온갖 억측이 분분하다. 물론 대림그룹은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로 일축하고 있 지만 이 회장 자신이 퇴진 선언 이후 외부접촉을 일체 피하고 있어 궁금 증은 가시지 않고 있다. 그는 쏟아지는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뒤로 하고 지난 6월10일 동남아와 중동의 현장을 둘러보겠다며 1~2주 일정으로 출국 해 버렸다. 김병진 신임회장도 언론과의 대면을 오는 7월1일 취임식 뒤로 미룬 채 6월11일 인도네시아로 출국했다.
그러나 이준용 회장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아 온 사람들은 그렇게 놀랄 일 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외부에서는 쇼킹한 일로 보는 것 같다. 그러나 평소 이 회장의 행동을 보아온 그룹 내부 사 람들로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로 보고 있다.” 그룹 한 임원의 말이 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로 보는 근거에 대해 그룹 관계자들은 이 회장이 평소 강조해온 경영철학 ‘공개경영’ 원칙을 꼽는다. 이 회장은 지난 93년 12월 선대 회장인 이재준 창업주의 뒤를 이어 대권을 승계했다 . 그후 94년 초 계열사 임직원들과 잇따라 만나면서 공개경영 원칙을 천 명했다. 공개경영이란 경영의 투명성을 바탕으로 각 계열사별로 자율과 책임의 원칙에 따라 의사를 결정하는 경영방식이다. 그는 당시 왜 갑자기 공개경영을 이야기하느냐는 궁금증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변명같지 만 그동안은 공개경영을 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 때 문에 개인생활과 조직운영에 필요한 비밀이 많았다. 이제는 주위환경이나 여건에서 과감하게 공개경영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이 회장은 지난 6월3일 사장단회의에서 “급격한 경영환경 변화에 대비해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고 명실상부한 책임경영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물러 나기로 했다”고 퇴진의 배경을 밝혔다. 한마디로 그동안 공개경영을 지 속적으로 추진해 온 결과 전문경영인체제가 구축됐다고 판단해 2선으로 물러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그룹의 한 임원은 “모기업인 대림산업에 대해 이 회장과 친인척 등 특수관계인이 갖고 있는 주식지분은 7.98%에 불과하고, 이 회장과 두 아들을 제외하고는 친인척으로 그룹에서 근무하 고 있는 사람이 한명도 없다”면서 “전문경영인이 중심이 돼서 책임경영 을 해보라는 이 회장의 뜻을 액면 그대로 받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문어발식 사업확장 안 한다”
이 회장의 2선 후퇴를 영토확장보다는 건설업을 중심으로 수성(守城)에 치중해 온 대림그룹과 이 회장 개인의 독특한 성격에서 찾는 이들도 많다 . 지난 39년 건자재상인 부림상회(대림산업의 전신)로 출발한 대림그룹은 계열사수 21개로 지난해 5조원을 넘는 매출액을 올린 재계랭킹 15위의 대 기업이다. 그러나 전체 그룹 매출액의 60% 정도를 건설분야가 차지할 정 도로 건설 위주의 사업구조를 가지고 있다. 계열사의 면면을 살펴보더라 도 국내 건설도급 랭킹 4위의 대림산업을 비롯해 고려개발, 삼호, 엔지니 어링, 요업, 흥산, 콘크리트 등 건설업 관련이 주축이다. 목재를 중심으 로 한 건자재판매를 시작으로 토목, 각종 건설자재 생산, 설계 등 고집스 러우리만큼 한우물만 파 왔다. 돈 되는 사업이라면 내것 네것 따지지 않 고 닥치는 대로 뛰어드는 문어발식 사업확장은 대림과는 거리가 먼 이야 기였다. 계열사 대부분은 기존 업체를 인수한 것이 아니라 직접 세운 회 사들이다.
그룹 기조실 관계자가 들려주는 일화는 그의 경영관을 잘 보여준다. “몇 년 전 국내 증권사들의 점포증설 경쟁이 치열했을 때다. 계열사인 서울증 권에서도 점포를 늘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오자 이 회장은 `‘ 우리나라 경제규모가 1백m 간격으로 증권사나 은행 지점이 있어야 할 만 큼 되는가’라며 일축했다.” 다른 대기업들이 신규 유망사업에 앞다퉈 뛰어드는 것을 보고 대림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된다고 건의하는 임원들에 대해 그는 “무슨 소리냐, 하던 일이나 잘하자”는 말도 했다. 또 이 회 장은 평소 “로비를 하면서까지 돈을 벌려고 하지 마라. 1등이 중요한 것 은 아니다. 정도경영을 하라”고 강조해 왔다.
이런 그의 경영철학은 선대 이재준 회장 때부터 대림의 전통이기도 하다. 6공 초기 5공비리에 대한 공방이 한창 치열할 때 대림산업은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 법원 신청사, 독립기념관 등 굵직한 공사를 수주한 것을 빌미 로 정경유착의 결과 아니냐는 집중포화를 받았다. 창업주 이재준 선대회 장이 5공 당시 정계 실력자였던 이재형 전 국회의장의 동생이라는 점도 작용했다. 외부시각이 어떻든 그룹 관계자들은 대림을 잘 모르고 하는 소 리라며 억울해 한다. “조금만 나서면 따낼 수 있는 공사도 중도에서 포 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우리를 놓고 답답하다느니, `‘곰바우’같다 느니, 공격적이지 못하다는 말을 하는데 솔직히 그런 면이 있다.” 외부 에서는 대림이 최근 몇년간 재계랭킹에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이유도 이런 그룹경영 방침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대림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13위권을 유지했으나 올해는 15위에 그치고 있다. 그룹 계열사의 한 임원 은 “이 회장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일반 장 사꾼이나 기업인들과는 사고방식이 전혀 다르다. 인간적으로 깨끗한 사람 이다. 기업인보다는 학자를 했으면 더 어울렸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경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KS’맨이다. 미국 덴버대학원에서 통계학을 공부한 뒤 대림산업에 입사하기 전까지 숭실대와 영남대 강단에 서기도 했다. 이 회장의 2선 후퇴를 놓고 외부에서 “그는 다른 그룹 총 수들과는 달리 경영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 같다. 경영에 매달려 아웅다 웅하기보다 회사는 유능한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뒤로 물러나 큰 일이나 챙기겠다는 생각인 것 같다”는 해석이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 때 문이다.
주요사안 등은 여전히 챙길 듯
이 회장의 2선 후퇴 이후 대림의 행보는 어떻게 변할까. 일부에서는 이 회장이 사장단회의에서 경영환경의 급격한 변화와 조직의 활력을 강조한 점을 들어 어떤 방식으로든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그러 나 이 회장이나 김 신임회장을 잘 아는 이들 중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지 않다. 그룹의 한 임원은 “경영환경 변화에 좀더 유 연하게 대처하는 노력은 있겠지만 그룹 내부적으로 큰 변화는 없을 것이 다. 신임회장도 공격적이라기보다는 차분한 경영스타일”이라고 말했다. 이는 이 회장의 이번 2선 후퇴가 완전한 경영은퇴는 아니라는 분석과 맥 을 같이 한다. 일상적인 것을 일일이 간섭은 않겠지만 그룹의 주요사안이 나 임원 인사 등은 여전히 이 회장이 챙길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재계의 ‘`기인’ 이준용 회장의 새로운 실험이 대림그룹과 한국 재계에 어떤 영 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곽정수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