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1997년06월12일 제 161호

기상천외 뇌물의 역사

뇌물사건이 정국을 한바탕 요란하게 흔들고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두번 씩 놀란다. 천문학적 규모의 뇌물액수에 경악하고, 기상천외한 뇌물전달 수법에 다시 한번 놀라곤 한다. 뇌물의 역사는 실로 감시의 그물망을 촘 촘히 짜 뇌물을 어떻게든 근절해보려는 국민과 정부의 노력에 맞서, 부패 한 공직자와 뇌물꾼들이 뇌물수수방법을 끊임없이 혁신해온 역사라고 해 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금융실명제 실시전에는 헌 수표가 인기

지난 93년 금융실명제가 실시되기 전까지 뇌물의 주요 수단은 단연 자기 앞수표였다. 수표는 돈다발보다 부피나 무게나 적어, 거액을 직접 건네기 손쉽다. 물론 뇌물을 받은 사람에게는 수표를 가명계좌에 넣다 뺐다 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는 이른바 `‘돈세탁’을 거쳐야 하는 불편이 따랐다. 그 런 까닭에 같은 자기앞수표라도 자금추적이 어려운 헌 수표가 더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나라 법원의 판례가 “뇌물은 공직자가 직무행위의 대가로 받 는, 법이 허용하지 않는 이익”이라고 폭넓게 정의하는 것에서 알 수 있 듯, 뇌물이 꼭 돈이나 유가증권으로만 건네졌던 것은 아니다. 지난 94년 세금횡령사건으로 구속된 인천북구청 안영휘 세무1계장은 91년 당시 북구 청 부구청장이던 강기병씨에게 시가 1억원대의 자신의 부동산을 30%의 가 격에 넘겨주는 수법으로 뇌물을 건넸다. 이보다 앞서 지난 78년엔 현대그 룹 소속 (주)한국도시개발이 당시 강남구 압구정동에 35∼60평 규모의 사 원용 아파트 9백52세대를 신축하면서 일부만을 사원들에게 분양하고 나머 지는 고위공무원, 금융기관 간부, 언론인, 예비역 장성 등에게 은밀히 분 양했다가 적발된 적도 있다. 아직까지 한번도 처벌받은 기록은 없지만 건 설회사들이 특권층에게 헐값에 집을 지어주는 것도 뇌물수수의 편법임에 틀림없다.

‘안방마님’들이 끼어든 뇌물사건에서는 대개 보석류가 돈과 함께 뇌물 목록에 등장하곤 했다. 지난 91년 김종호 전 해군 참모총장의 부인에게 인사청탁을 하며 돈을 건넸던 한 장교 부인은 남편이 진급에서 누락되자 돈을 되돌려 받으며 “금반지는 왜 안 돌려주느냐”고 항변했다고 해서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기도 했다. 이양호 전 국방장관의 경우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에게 인사청탁을 하면서 다이아몬드 목걸이와 반지를 건넨 사실이 검찰 조사과정에서 밝혀졌다.

거래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는 골동품이나 예술품 등도 뇌물로 곧잘 활용 된다. 가깝게는 지난 94년 장승포시장과 거제군수가, 울산군수와 경남도 건설국장으로 각각 재직하는 동안 건축업자에게서 편의를 봐달라는 부탁 과 함께 운보 김기창 화백의 청록산수화(시가 1천5백만원 상당) 1점씩을 받았다. 지난 81년에는 림재정의원(민한당)이 “문공위원들이 교육공무원 법을 심의하면서 대한교련으로부터 화문석 돗자리를 받았다”고 폭로한 이른바 돗자리사건으로 문공위 소속 국회의원 9명이 윤리위로부터 경고를 받은 일도 있다. 물론 돗자리는 당시 시가로 13만8천원에 불과해, 요즘 같으면 “그게 무슨 뇌물이냐”는 소리를 들을 법도 하다.

이권 댓가로 배당금 챙기곤 뇌물아니다?

이권의 대가로 또다른 이권을 주는 것보다 더 은밀한 뇌물은 없을 것이다 . 지난 94년, 천기호 전 치안감은 슬롯머신업자에게 사업권을 허가해주고 자신의 형 명의로 계좌를 개설해 5천만원을 투자한 뒤 배당금 명목으로 모두 1억5천만원을 받아 챙겼다가 파면됐다. 그는 그러나 “배당금이 어 떻게 뇌물이 될 수 있느냐”며 파면처분 취소소송을 법원에 내기도 했다.

특별히 거액의 뇌물을 전달하는 데는 양도성예금증서(CD)가 이용되기도 했는데, 금호그룹 박성용 회장이 지난 90년 노 전 대통령에게 20억원짜리 양도성예금증서를 전달한 것이 그 예다.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는 돈의 흐름을 투명하게 해 검은돈의 연결고 리를 끊어야 한다는 국민적 여망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이때부터는 다시 1만원짜리 지폐가 뇌물수단으로 각광받기 시작했고, 이같은 상황변화는 한편으로 뇌물전달의 새로운 풍속도를 만들기도 했다. 로비의 귀재였던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은 홍인길 의원에게 2억원을 건넬 때는 돈을 사과 상자에 담아 차 트렁크에 실어줬고, 정재철의원에게 돈을 건넬 때는 1억 원을 골프옷가방에 넣어 전달했다고 한다. 임춘원 전의원이 정태수 회장 에게서 “새로 개발된 약 시제품이니 드셔 보시라”며 건네받은 약상자에 는 1만원짜리 지폐 1천장이 들어 있었다. 은밀하게 뇌물을 전달하는 장소 로는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호텔 지하주차장이 주로 애용됐다.

실명제 실시 초기에 금괴가 불티나게 팔려나가 새로운 뇌물수단으로 한때 관심을 끌었는데, 95년 9월 은행감독원이 은행들에 금괴를 사는 고객의 실명을 확인해 기록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부터 금괴 판매실적은 절반으 로 뚝 떨어졌다. 94년 19년 만에 상품권 발행이 다시 허용되면서부터 상 품권이 소액뇌물 전달에 많이 활용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손홍균 전 서울은행장은 전문금융인답게 실명제의 허점이 어디에 있는지 사람들에게 확실히 보여주었다. 그는 95년 9월 국제밸브공업에 어음할인 한도액을 늘려주고 대출을 해주는 대가로 이 회사 대표 박현수씨에게서 모두 5천만원을 받았는데, 이 가운데 1천만원을 박씨 명의로 된 통장과 도장으로 받는 새로운 수법을 선보였다. 그는 나머지 4천만원도 이 통장 에 입금했다가 빼쓰는 방법으로 사법기관의 눈을 절묘하게 피했다.

한보로비 사건 수사과정에서는 한보철강 정태수 회장이 전환사채(CB)를 발행해 헐값에 인수하는 수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하면서, 전환사채의 일부 를 직접 권력자에게 뇌물로 건넸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 전환사채는 뇌물을 받는 사람이 다른 사람 이름으로 일단 인수했다 주 식으로 전환한 뒤 되팔면 되기 때문에 손쉬운 뇌물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서 출발했지만, 진상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이 밖에도 뇌물 전달수법을 일일이 열거하자면 수백 가지는 족히 될 것이 다. 정치후원금, 경조비 등을 통한 뇌물전달은 너무 흔한 일이라서 심지 어 뇌물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검찰이 지난 95년 기 업체들에 돈을 받은 전 청와대 비서관 장학로씨를 기소하면서 남긴 “떡 값은 처벌할 수 없다”는 말은 뇌물의 역사에서 빠트려서는 안 될 중요한 어록 가운데 하나다. 장씨가 기업체들에 받은 돈은 모두 27억여원이었는 데, 그 가운데 떡값은 무려 21억여원이었다.

수백만원대 난도 신종 뇌물로 등장

뇌물의 역사에는 “설마 그런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들도 많다. “그래 도 지구는 돈다”는 말을 남긴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오조차도 당시 피렌체의 유력자에게 자신이 발명한 망원경을 선물하고 피사대학 수학교 수 자리를 따냈고, 미국의 링컨 대통령도 대통령 재직시절 노예제도를 폐 지하도록 헌법을 바꾸기 위해 야당의원들을 뇌물로 매수하라고 지시한 것 으로 전해진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깨끗한 공직자가 돼라”는 뜻에 서 선물하는 난이 때로 뇌물의 수단으로 활용된다는 사실이 바로 그런 예 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인사철이 되면 난을 선물로 보내는 것이 한 유행이 됐는데, 이 가운데는 몇백만원을 호가하는 것도 있다고 한다. 지난 95년 연예계의 비리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일부 프로듀서들이 여자 연예인들에게 성을 상납받았다고 해서 배임죄로 처벌할 것인지가 논 란이 된 적도 있다. 자신의 성이든, 다른 사람의 성이든 권력자에게 성을 상납하는 일은 지금은 과연 사라졌을까?

정남구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