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적 |
1997년06월12일 제 161호
|
|---|
(사진/신권 1백달러짜리 2백장의 두께는 1.5cm에 지나지 않고 자금추적도 어려워 신종 뇌물수단으로 각광받고 있다.)
지난 5월 초 서울 강서지역의 모 시중은행 지점에서 있었던 일이다. 50세 남짓한 한 남자가 환전창구를 찾았다. 그는 본인의 것을 포함해 두개의 여권과 돈뭉치를 내려놓았다. 모두 달러로 바꿔달라는 부탁이었다. 모두 1만원권 지폐로 가져온 원화는 2만달러를 살 수 있는 액수였다.
한보사건 이후 수상한 환전요구 급증
지난해 6월 대폭적인 외환자유화로 해외여행객의 여행경비용 환전 한도가 1인당 1만달러까지 늘어났다. 2만달러는 여권 2개로 환전할 수 있는 최대 한도이다. 그는 매일 변하는 환전시세를 잘 아는 듯했다. 환전하고 남는 자투리 돈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어 그는 2만달러를 모두 1백달러짜 리 신권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그것도 빳빳한 새 지폐로만. 순간 은 행 직원은 슬쩍 지나치는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 그러나 그는 무뚝뚝하니 말을 거의 안 했고 눈길이 마주치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듯했다. 직 원은 즉각 쓸데없이 말을 건네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경험상 그렇지 않으면 이 고객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 확실했기 때문 이다. 그 사람이 환전한 달러는 해외여행용이 아니라는 생각이 스친 것은 물론이었다. 남자는 잠시 뒤 양복 속에서 꺼낸 지갑에 2만달러를 넣은 뒤 사라졌다. 2만달러가 담긴 그의 왼쪽 가슴은 거의 표시가 나지 않았다. 신권 1백달러짜리 2백장의 두께는 1.5cm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한보와 김현철씨 사건 탓인지 고액달러만 찾는 수상한 환전 요 구가 급격히 늘고 있다. 금융기관 종사자들은 이 돈을 뇌물용이라고 단정 한다. “단순 여행용이라면 굳이 1만달러씩 현금으로 환전을 할 필요가 없다. 도난위험도 적고 보관도 쉬운 여행자수표나 신용카드가 있기 때문 이다. 외화 밀반출을 위한 것 아니냐는 의심도 할 수 있지만 보유한도 이 상의 달러를 가지고 출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시중은행 한 관계 자의 설명이다.
또 꼭 1백달러짜리 고액지폐만 찾는 것도 수상하다. 여행 목적이라면 고 액권과 함께 자투리 돈도 필요한 것이 상식이다. 중견업체에서 자금담당 임원으로 있는 박모씨는 “금융실명제나 최근의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탓 인지 조그마한 인사라도 수표를 이용하는 것은 부담이 된다. 받는 사람이 일단 거부감을 보인다. 아직 달러를 이용한 적은 없지만 큰 건이 아니라 면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금융기관들이 고액달러 환전을 `‘검은돈’과 연결짓는 것은 달러의 경우 사실상 자금추적의 걱정이 없기 때문이다. 실명제 이후 자금추적을 당하 기 쉬운 수표 사용이 줄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1백달러 지폐는 10만원권 자기앞 수표 구실을 훌륭히 해낸다. 현금과 똑같아 이서도 필요없다.
여권만 있으면 누구나 환전 가능
환전 절차도 의외로 간단하다. 여권만 있으면 된다. 물론 원칙적으로 본 인의 여권이어야 한다. 은행 직원은 마지막 입국일 이후 얼마나 환전했는 지 확인한 뒤 총 환전 누계액이 1만달러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환전해준 다. 환전 뒤에는 여권에 환전필 도장을 찍고 환전금액을 적는다. 그러나 요즘에는 환전필을 꼭 찍지 않아도 된다. 여권에 환전필이 찍히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불평이 먹혀 들었기 때문이다. 요즘 은행들은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여권에 여권카드발급필만 찍어준다. 대신 환전금액이 적힌 환전증명서를 내준다. 여권만 보아서는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이 환전을 했는지 알 길이 없다. 물론 은행의 환전관리대장에는 환전 날짜, 환전자 이름, 여권번호, 환전금액 등이 적힌다. 그러나 그뿐이다. 환전내역을 개 인별로 전산관리하는 등의 사후관리는 사실상 전무하다.
외환자유화 이전에는 한국은행에서 환전내역을 꼼꼼히 관리했지만 지금은 옛말이다. 한은 국제부 외환분석팀 관계자는 “국제수지 파악 차원에서 분기별로 해외여행객 사용경비 통계를 내고 있지만 달러현찰 환전 외에 여행자수표로 환전한 것과 달러 이외의 다른 외국환으로 환전한 것까지 모두 포함돼 있기 때문에 분석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남의 여권을 가지고 환전하는 일도 적지 않다. “최근 한 고객이 대리인 을 자처하며 다른 사람의 여권 3개를 가지고 와서 3만달러를 환전해 달라 고 부탁한 적이 있다.” 한 시중은행 외환담당자의 말이다. 은행은 이때 도 환전을 거부하지 않는다. 수입이 짭짤하기 때문이다. 1달러를 사고 파 는 데 은행에 떨어지는 수입은 25원(현금 기준)이 넘는다. 전표에다 대리 인의 인적사항만 적어 놓는다. 은행원과 대리인이 아는 사이라면 본인이 환전을 한 것인 양 모른 척하면 끝이다. 또다른 시중은행의 관계자는 “ 환전용 여권의 경우 본인 것과 남의 것이 거의 반반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한다.
은행이 환전용 여권을 아예 빌려주는 경우도 있다. 최근 서울 강남의 한 시중은행 지점에서 있었던 일이다. 지점장이 갑자기 직원 중에 여권있는 사람을 찾았다. 고객을 위해 직원들의 여권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당 시 지점장은 직원 여권을 이용해 고객에게 4만달러를 환전해 주었다. 동 료 중에는 이 때문에 정작 자신이 해외여행을 갈 때 환전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일조차 종종 있다.” 은행 직원의 귀띔이다.
지난해 11월 미국 시애틀 주재 한국총영사가 5만달러를 가지고 김포공항 을 출국하려다 적발된 일이 있다. 그에게 달러 밀반출을 부탁한 장모씨는 본인과 부인, 회사 직원 등 3명의 여권만 가지고 5만달러를 환전한 것으 로 드러났다. 물론 은행 직원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달러 매입시는 반드시 현금사용
수상한 환전자들은 환전용 원화를 꼭 현금으로 가져오는 것이 특징이다. 그것도 만원짜리로 말이다. 수표로 가져올 경우 실명확인을 받는 것을 피 하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지난 5월 중순 서울 목동의 시중은행 지점에는 나이 지긋한 한 노인이 찾 아왔다. 그는 만원권 뭉치를 내밀며 1백달러짜리 신권으로 1만달러를 바 꿔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평소 이 지점과 거래가 많은 주요 고객이다. 그 는 고액달러를 요구할 때 기존 보유통장으로 거래한 적이 거의 없다. “ 통장에서 예금을 빼내 달러로 환전하면 돈에 꼬리표가 달리게 된다. 간혹 통장에서 돈을 빼내 환전할 때도 두 거래가 연결되지 않도록 전표를 끊어 달라는 부탁을 잊지 않는다.” 이 지점 여직원의 말이다.
수상한 달러환전은 서울 강남과 여의도, 목동 등 부유층 아파트 밀집지역 에서 특히 극성이다. 서울 여의도 한 시중은행 지점 관계자는 “한달이면 이런 고액 환전자가 5명을 넘는다. 이들의 월환전금액은 적을 땐 10만달 러, 많을 때는 50만달러에 이른다”고 말했다.
올 들어 환율이 크게 오르면서 국내인이 여행경비가 아니라 단순한 보유 목적으로 달러를 환전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달러를 보유목적으로 환전 하는 것은 연간 2만달러 안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지정은행을 꼭 정해 놓 고 그 은행과만 거래를 해야 한다. 달러를 거주자 외화예금으로 은행에 예치하는 경우는 보유한도가 없다. 거주자 외화예금은 지난해 12월 말까 지 14억9천만달러에 불과했으나 올 3월 말에는 43억9천만달러까지 급증했 다. 4월에는 환율이 되레 떨어지면서 33억달러까지 줄어들었다. 그러나 거주자 외화예금 역시 은행에서 달러로 환전되는 즉시 다시 입금되기 때 문에 문제될 소지는 없다.
달러매각시에도 수표 철저 기피
수상한 달러 환전이 늘고 있는 것은 달러 뭉칫돈을 원화로 바꾸는 사례가 늘고 있는 데서도 확인된다. 달러를 원화로 바꾸는 것 역시 2만달러까지 가능하다. “최근에 공무원 셋이 함께 8천달러를 가지고 와서 셋으로 쪼 개 원화로 바꿔 줄 것을 요구했다. 고객편의를 위해 7백여만원을 몇장의 수표로 나눠주니까 도리어 화를 내 당황했다. 모두 현금으로 달라는 것이 었다.” 시중은행 한 직원의 증언이다. 고액달러가 실제 뇌물로 쓰인 일 이 드러난 사례는 아직 없다. 그것은 아마도 원화로 재환전해야 하는 불 편 때문에 거액의 뇌물 수단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규모 검은 거래에서는 유용한 수단임이 분명하다. 신종 뇌물수단, 고액 달러의 꼬리가 언제 잡힐지 궁금하다.
곽정수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