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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
1997년06월12일 제 1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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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수출이 늘고 금리가 떨어지는 등 실물경제가 호전 추세를 보이자 증권시장도 기지개를 펴고 있다.)
금융대란이라는 이름의 유령이 끊임없이 금융시장 주변을 계속 떠돌며 ‘ 신용질서’를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6~7월중으로 대기업 2~3개가 더 쓰러지고, 그 여파로 금융기관의 자금회수가 급격히 확산되면서 급기야 금융시장이 공황상태에 빠져들지도 모른다는 추측성 소문이 바로 그것이 다. 금융대란설은 재경원과 한국은행의 단호한 일축에도 쉽게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제2금융권 여신회수로 자금난 가중
연초 한보사태 후유증으로 4월금융대란설이 한차례 자금시장을 휩쓸고 간 데 이어, 또다시 금융대란설이 고개를 든 것은 대농그룹이 부도방지협약 적용을 스스로 신청하고 나서면서부터다. 뿌리는 진로그룹의 부도사태 이 후 도입된 부도방지협약. 협약적용 기업이 발행한 어음에 대해 만기가 돼 도 한푼도 돌려받지 못하게 된 제2금융권이 여신을 닥치는 대로 회수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이런 사태는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잦아들었지만, 진 로에 이어 대농이 부도방지협약 적용을 신청하고 나서자 금융시장은 다시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제2금융권은 재무구조가 나쁘거나 자금사정이 나쁘 다고 소문난 기업에 대해서는 경쟁이라도 하듯 여신을 회수했다. 이런 사 태가 앞으로도 계속돼 자금난을 겪고 있는 한두개 재벌그룹이 쓰러지면, 금융기관의 여신 기피 경향이 더욱 확산돼 결국 잇따른 부도사태로 이어 질 것이라는 불안감의 반영이 금융대란설이다.
지난 5월30일 한신공영의 법정관리 신청은 금융대란설 아래에서 재무구조 가 취약한 기업이 어떻게 쓰러지게 되는지를 그대로 보여줬다. 국내 건설 업계 도급순위 24위인 한신공영은 지난해 말 자본금 8백47억원에 부채비 율이 598%에 달하는 등 재무구조가 비교적 나빴던 탓에 올 들어 제2금융 권의 대출금 상환요구에 직면했다. 한신공영은 4월에 서울은행에서 4백50 억원의 긴급구제금융을 대출받았지만 제2금융권에만 그동안 모두 5백90억 원을 상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신공영 관계자는 “거액 대출금 상환에 도 불구하고 제2금융권의 대출거부는 계속됐고, 어음 기간연장은 물론 어 음할인까지 안 돼 심각한 자금난을 겪어 결국 법정관리를 신청하게 됐다 ”고 말했다. 건설업계에서는 한신공영만이 아니라 주택사업 비중이 높은 몇몇 건설업체가 아파트미분양의 후유증으로 계속 자금난을 겪고 있어 연 쇄부도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중소기업의 부도도 계속 늘고 있다. 부도업체수는 지난 1월 하루 평균 44 .6개에서 4월에는 52.7(월 1천3백18)개로, 95년 7월(월 1천3백42개) 이후 가장 많았다. 어음부도율도 82년 장영자사건 이후 연중 최고치를 매달 경 신하고 있다. 지난해 연평균 0.14%였던 어음부도율은 1월 들어 0.21%로 0 .2%대를 돌파하더니 4월에는 0.25%로 급등하고 있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 앙회가 지난 5월26일부터 사흘간 종업원 5인 이상 1천6백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중소기업들은 6월금융대란설에 대해 75.6% 가 “우려된다”(다소 52.1%, 매우 23.5%)고 대답했다.
은행관계자 “재벌 부도는 대농이 마지막”
그러나 한국은행이나 금융기관 관계자들은 금융대란설에 대해서는 “과장 된 것일 뿐”이라며 그 가능성을 일축하고 있다. 자금시장 사정이 점차 호전되고 있으며, 설령 대기업 한두개가 앞으로 더 쓰러진다 해도 그것이 금융대란으로까지 번질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한 은행의 한 관계자는 “ 재벌의 부도는 대농으로 끝일 것”이라며 다소 희망적인 견해를 밝혔다. 채권은행들이 진로그룹에 경영권 포기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만큼 진로 나 대농은 부도방지협약 적용대상이 된 것을 오히려 후회하고 있고, 다른 대기업들도 자구노력에 더욱 박차를 가하리라는 것이다. “일부 재무구조 가 취약한 대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장 어 음 들어오는 것조차 못 막을 정도는 아니다.” 한국은행 박철 자금부장은 “언론이 대기업들의 방만했던 경영상태나 자구노력 등에 대해서는 도외 시하고 위기감만 지나치게 부추기고 있다”면서 “자금시장은 오히려 안 정을 찾아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시장실세금리는 4월 이후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어 자금시장은 비 교적 안정돼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5월 말 단기 콜금리는 11.70%, 회 사채수익률(3년만기)은 11.86%를 기록하고 있어, 올 들어 최고치였던 4월 말의 14.46%와 12.5%에 비해 크게 떨어졌다.
그러나 이같은 금리하락은 자금시장의 안정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 시중 금리의 높고낮음에 따라 자금이 움직이지 않고 기업의 신용에 따라 움직 이는 만큼, 기업들은 재무구조에 따라 자금시장에서 빈익빈 부익부 상황 에 처해 있는 것이다. 금리하락도 제2금융권의 자금이 남아도는 데 반해 회사채 발행은 줄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더욱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 고 있다.
당초 5월에 발행될 회사채는 2조4천억원 가량이었는데, 금융기관의 보증 거부로 2천억원 정도가 발행이 취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부실여신을 줄이려는 노력과 함께, 오는 6월 말까지 국제결재 은행의 자기자본비율(BIS) 규제치인 8%선을 고수해야 한다는 부담이 회사 채 지급보증을 더욱 꺼리게 하는 요인”이라고 말한다. 이에 따라 회사채 지급보증 연기 수수료도 크게 올라 1%대를 넘고 있으며, 같은 그룹 소속 이라도 계열사에 따라 우량기업과 부실기업의 대접도 크게 다르다. 반면 에 종금사의 어음할인 잔액은 4월에 2조6백80억원이 준 데 이어 5월에도 25일까지 4천14억원이 줄어, 결국 제2금융권이 기업대출을 억제하거나 회 수해 생긴 여유자금은 3조원 정도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결국 회사채의 발행물량이 줄어들면서, 종금사 등 마땅한 자금운용처를 찾지 못한 제2금융권 자금이 회사채 시장으로 몰려 금리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 이다.
그러나 종금사의 자금여력은 기업들의 자금수요가 상대적으로 줄었다는 데도 원인이 있다는 지적이다. ㄷ종금 관계자는 “제2금융권에 자금여력 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재무구조가 좋은 기업에는 돈을 빌려주려 해도 빌려가지 않고, 자금이 필요한 기업들은 나쁜 소문이 날까봐 가능한 손을 안 벌린다”고 말했다.
“알려지면 돈 못 구한다” 대출상담도 기피
지난 5월24일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처음 문을 연 은행감독원 금융애로신 고센터 박계주 검사역은 “처음 문을 연 이틀 동안 11개 중소기업이나 개 인사업자가 소액대출과 관련해 상담이 들어왔지만 무리한 자금회수로 빚 어진 일은 아니었다”면서 “그뒤로는 상담이 전혀 들어오지 않고 있다” 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한 기업 관계자가 상담을 신청해온 일이 있는 데, 아직은 크게 어렵지 않고 회사이름이 알려지면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 리라는 우려 탓인지 끝내 이름 공개를 꺼린 적은 있다”고 덧붙였다. 한 국은행 박철 자금부장도 “금융대란설을 부추기는 것은 정리해야 할 기업 이나 자구노력을 하지 않는 기업에게까지 무조건 돈을 빌려주라는 얘기밖 에 안 된다”면서 “설령 기업들이 몇개 쓰러진다고 해서 대란이 생긴다 면 그게 나라냐”고까지 말했다.
문제는 불안심리가 어떤 방향으로 작용하는가이다. 금융기관들 사이에 불 안심리가 확산되느냐 사라지느냐에 따라 대란설은 현실화될 수도 있고, 또한번의 풍선껌으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ㅇ종금 관계자는 “우리 가 돈을 빌려줘도 다른 종금사에서 회수해버리면 무슨 소용이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몸을 가볍게 해둬야(부실 여신을 줄어야) 한다는 생각이 종금사들 사이에 아직은 팽배하다. 건실한 중소기업이 도산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면서 “그러나 금융기관간, 그리고 금융기관과 기업 사이의 불신이 사라지고 실물경제의 회복기미만 보이면 문제는 자연 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하나 문제는 부도조처가 유예된 진 로와 대농의 향배다. 경영권 문제로 아직 채권은행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두 그룹의 자구노력이 실패해 부도로 내몰릴 경우 자금시장은 또한 번 파란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금시장이 전반적으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는 징후도 있다. 은 행의 상업어음(CP) 할인이나 종금사의 어음할인이 조금씩 늘고 있는 것이 다. 은행권은 지난 1월 모두 7천5백24억원을 회수했으나, 4월에는 1천9백 26억원, 5월에는 1조1천7백9억원을 할인하는 등 자금을 풀었다. 종금사들 의 어음할인 규모도 4월 한달 동안에는 1조6천9백억원의 감소를 기록했으 나, 5월 들어서는 5천3백43억원어치를 사들여 조금씩 회복세를 보이고 있 다.
무엇보다도 실물경제에 대한 전망이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다. 2/4분기 들 어서면서 수출이 늘고 있고, 산업생산도 호전되고 있다. 전체 무역수지는 전자제품, 자동차 등 중화학공업제품의 수출이 늘고 원자재의 수입증가세 가 주춤하면서 적자폭이 4월 들어 5억달러 이상 줄었다. 통관기준으로 수 출은 4월 들어 지난해 같은 달보다 7.0%가 늘었으며, 5월 들어서도 수출 가격은 오르지 않았지만 반도체와 석유화학제품을 중심으로 상승세를 계 속 이어가고 있다. 4월중 산업생산도 3월에 비해 10.7%가 늘어나 국내경 기도 나아지고 있다. 종합경기 선행지수를 보면, 3월에 0.9% 상승한 데 이어 4월에도 1.1%가 높아졌다. 재고는 13.2%가 늘어났지만 증가세는 그 런 대로 다소 둔화됐다.
증권시장이 기지개를 펴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이런 실물경제의 호전을 낙 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은 “부도방지 협약은 고육지책이다. 중장기적으로 바람직한 정책은 아니지 만 비판이 있다고 해서 없앨 수는 없다. 아직 기업들의 자금사정이 그렇 게 심각한 상황이 아닌 만큼,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자금이 배분돼 향후 전체 경쟁력을 높이는 게 지금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실물경 제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므로 6~7개월 정도만 지나면 상황이 개선될 것 ”이라고 내다봤다.
수출늘고 실물경제도 호전, 비관적 상황아니다
정부의 견해는 한마디로 “국가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방만한 경영 을 해온 기업들이 구조조정을 통해 고통을 함께 감내해야 한다”는 것으 로 요약된다. 자금을 풀라는 기업들의 아우성은 금단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김영삼 대통령은 지난 5월23일 부당하게 대출금을 회 수하는 금융기관에 대해 특검과 함께, 부도방지협약에 대한 보완도 함께 지시했다. 불안심리를 잠재우기 위해서다.
지난 5월30일 강경식 경제팀이 대통령담화에 대한 후속조치로 “차입금이 많은 기업에는 금융비용 손비인정 범위를 축소하고 재벌그룹 계열 기업간 채무보증에 대해서도 세제상 규제조치를 취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것도 일단은 “금융대란은 없다”는 자신감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 된다. 당장 전경련이 “급속한 개혁 추진은 기업경제의 활력을 저해할 것 ”이라며 거부감을 표시하고 나섰지만, 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와 빚 얻 어 장사하는 고질적인 기업풍토를 개선해야 한다는 인식에 대해서는 국민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만큼, 이번 경제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기업의 체질 개선을 강력히 요구하는 현 경제팀의 의지를 좀더 지켜볼 일이다.
정남구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