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1997년06월12일 제 161호 한겨레21

대권주자들의 1987년 6월

(사진/민주화의 성지로 현대사에 자리매김한 명동성당의 87년 6월. 그때 지금의 대선주자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

87년 6월 한국의 초여름을 불사른 전국민적인 항쟁이 잉태한 대통령 직선 제.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 정치권은 그 항쟁의 성과물을 자신의 것 으로 하기 위한 필사의 승부를 겨루고 있다. 10여명의 대권주자들이 12월 대선에서 대권을 점령하기 위해 숨 돌릴 틈없이 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6월이 되면서 한편에서는 “과거 군사독재 시절 호의호식하던 사 람들이 대통령후보를 자처하고 나서 국민을 기만하고 있다”는 비판의 소 리가 들린다. 이 비판은 10명의 대권주자들을 향해 ‘과연 그들은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어떤 이는 항쟁의 전면 에 서기도 했고 어떤 이는 항쟁을 역류하는 악역을 맡기도 했다. 또 몇몇 은 아예 침묵하고 있었다.


최루탄 속에서도 대선겨냥 신당 창당준비

국민회의 대통령후보로 확정된 김대중 총재. 그는 87년 6월항쟁 기간을 연금된 상태로 보냈다. 미국으로 건너간 지 7백77일 만인 85년 2월8일 귀 국해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된 그는 전두환 대통령의 ‘4.13 호헌조 치’가 이뤄지기 닷새 전인 4월8일부터 동교동 자택에 연금당한 것이다.

그는 86년 11월5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뤄지면 사면복권이 되더라 도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며 개헌투쟁에 온전히 힘을 쏟고 있었 다. 6.10 전날인 9일 그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어떤 경우에든 비폭력 평화적으로 임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10일에는 전화를 통해 “현 정 권이 일당독재의 야망을 포기하고 국민의 민주결의에 복종하는 그날까지 국민과 더불어 싸우겠다”고 항쟁을 독려했다.

하지만 25일 연금이 해제되고 7월10일 사면복권이 되자 그는 불출마 약속 을 뒤로 물리고 출마를 위한 수순을 밟아 나갔다. “국민의 뜻을 직접 알 아보기 위해”라는 명분 아래 광주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대중집회를 가진 뒤 9월8일엔 “국민의 뜻” 이라며 평민당을 창당, 출마를 공식화했다. 신한국당 예비주자인 김덕룡 의원은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비서실장 으로 항쟁 기간 내내 그의 곁에 있었다. 항쟁 당일 최루탄 세례를 받으며 경찰차에 실려가기도 했지만 그의 주된 구실은 투쟁보다 김 총재의 조직 기반을 넓히는 일이었다. 5월1일 통일민주당 창당을 위해 당시 사분오열 돼 있던 야권 세력들을 규합했고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 뒤에는 12월 대선 에서 김 총재가 이길 수 있도록 조직을 강화하고 정치 신인들을 흡수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유신의 적자이기도 했던 박찬종 고문은 정권의 몰락과 함께 82년 인권변 호사로 변신한 뒤 민추협과 신한민주당 인권옹호위원장을 맡았다. 4.13 호헌조치 일주일 뒤인 4월21일 신민당을 탈당, 통일민주당 창당 작업에 동참했다. 87년 5월1일 창당과 함께 정책심의회 의장을 맡아 6.10 기간 당의 정책 브레인 구실을 담당했다. 그에 앞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담당하기도 했다. 그 역시 제도권 정치인의 한계로 항쟁 의 전위에 서기보다는 ‘항쟁 이후’의 정치상황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6 .29 선언 뒤엔 당의 직선제 개헌안을 만드는 데 힘을 집중했다. 그러나 두 김씨가 대선을 앞두고 분열한 11월 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는 활동으로 돌아섰고 단일화에 실패하자 결국 민주당에서 탈당해 홀로서기에 나섰다.


개헌 요구는 정권탈취 위한 불온한 짓

야권에 몸담은 이들과는 달리 항쟁에 거스르는 구실을 했던 이들이 신한 국당 이한동 고문과 최병렬 의원이다.

특히 4.13 호헌 당시부터 6.10항쟁이 마무리될 때까지 집권 민정당의 원 내총무였던 이 고문은 악역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4.13 호헌 조치 이후 개헌 요구에 대해 “현실을 무시한 정권탈취 목적의 투쟁일변도 자세”라 고 정권의 입장을 대신했다. 하지만 전국을 휩쓸던 6.10항쟁의 파고가 높 아지면서 그는 여권 내의 몇 안 되는 협상론자로 돌아섰다. 16일에는 “4 .13 조치를 제외한 모든 현안을 협상할 수 있다”며 야당과의 대화를 시 도했다. 21일에는 “구속자 석방과 김대중씨의 연금해제 등은 검토될 수 있다”고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또 이 고문쪽에 따르면 민정당 내 강 경진압론에 대해 온건론으로 대응했다고 한다. 실제 이 고문은 6월21일 서울가락동 중앙정치연수원에서 열린 민정당 의원총회에서 “시간을 정하 지 말고 논의하자”며 무려 6시간10분 동안의 회의를 통해 야당과 대화를 이끌어내는 등 나름의 노력을 보였다.

최병렬 의원은 당시 민정당 정세분석 실장으로 전국적인 시위에 대한 분 석과 대응방안 등을 수립하는 일을 맡았다. 하지만 최 의원의 한 측근은 “당시 초선의원으로 적극적인 역할을 할 위치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오히려 시위가 확대되던 시점에 명동성당을 직접 둘러본 뒤 국민적 저항 이 화이트 칼라의 이반으로 이어지는 심각성을 인식하고선, 정부의 대응 이 강경론에서 온건론으로 전환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두 환 정권이 끝내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의원내각제’ 당론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한 이론가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서울대 법대 교수였던 신한국당 이수성 고문은 정치적 격변기 때마 다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과는 달리 침묵하고 있었다. 지난 73년 유신반대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을 보호하려다 진압경찰에 두들겨 맞고 호송차에 실 려갔고, 80년 5월 광주항쟁 직전 서울역 앞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을 설득 해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이끌어냈던 그였다. 그러나 6.10 전야인 5 월2일 변형윤 교수 등 1백22명이 참여한 “개헌에 의한 민주헌법 마련” 을 촉구하는 시국성명에도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이 고문은 “교수로서 학생들의 안전에 신경썼을 뿐 외적인 활동은 자제했다”고 그 이유를 밝 혔다.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였던 이홍구 고문 역시 개헌 시국성명은 물론 어떤 행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신념으로 침묵했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신한국당 이회창 대표와 이인제 경기도지사 역시 6월항쟁과는 상당히 먼 거리에 있었다. 이 대표는 신군부에 의해 81년 4월 대법원판사에 임명된 뒤 86년 4월 임기를 마치고 변호사 생활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하지만 88 년 2월 노태우 정권 출범을 앞두고 구성된 관선 ‘민주화합추진위원회’ 에는 참여했다.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인사가 참여해야 한다는 간곡한 요청이 있어서”라는 게 이 대표쪽의 설명이다. 이인제 지사 역시 당시 변호사로 ‘생업’에 전념했다.


침묵이 사태를 민주적으로 해결하는 비결?

자민련 김종필 총재. 그는 항쟁 기간은 철저히 침묵했지만 직선제 개헌이 이뤄지자 발빠르게 정치권에 진입했다. 86년 2월25일 2년여 만에 미국에 서 귀국한 그는 추종자들로부터 정치 재개를 독촉받으면서도 “내 뜻을 밝힐 때가 아니다”라며 지켜보기만 했다. 그는 9월28일 “국민에게 공화 당 18년의 공과를 심판받겠다”며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항쟁 기간중 침 묵했던 이유에 대해 87년 9월8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떤 일을 하 더라도 다시는 물리적인 방법은 그만두고 처음부터 민주적으로 해보자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신승근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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