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97년06월12일 제 161호 한겨레21

산부인과

감독 박철수/출연 황신혜, 방은진

김정룡/ 영화평론가

르네상스 이후 서양의 근대가 시작한 이래 최근 4세기 동안 인류의 인식 론적 패러다임에는 참으로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 한 우주개념의 변모로부터 인간 육체의 체계적인 통제에 이르기까지 방대 하게 걸친 문명의 대전이과정에서 출산과 죽음의식의 변화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철학자 민형원 교수의 견해를 요약한다면, 생명 존재의 시초이자 종말인 탄생과 사망이라는 사건은 18세기 이전까지 대체로 공동체의 사건 이면서 동시에 사적 공간을 벗어나지 않는 실존적 체험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과학의 이름으로 또는 의학의 이름으로 제도화하면서 이런 삶의 사 건은 낯선 공적 공간으로 떠밀려 들어갔다. 소외돼간 것이다.

출산의 경우는 문제가 또 다른데, 과거에 그것은 사회의 존속 여부와 연 결된 행사로서 동네 여인들의 활기찬 축제였다. 그러나 과학지식의 축적 과정을 거치면서 출산에 대한 지식의 지배권은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뀐다 . 남성 의사의 등장은 무엇보다 르네상스 이후 해부학적 정보를 남성이 독점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여기서 생긴 병폐는 무엇인가. 산부인과라는 의학 제도의 등장이다. 1712년 프랑스에서 처음 생긴 산부인과의 당시 명 칭은 “임신을 한 불쌍한 여자를 위한 과”였다. 주지하다시피 산부인과 와 관련된 의술은 남성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남녀 성차를 철저히 정상 대 비정상으로, 건강 대 질병으로 고착시키면서. 출산은 질병, 산모는 애 낳는 환자 또는 기계가 된 것이 그 즈음부터다.

박철수 감독의 신작 <산부인과>가 겨냥하고 있는 지점은 산부인과라는 제 도가 아니다. 산부인과라는 장소에 출몰하는, 갖가지 사연을 지닌 남녀의 요지경 행태다. 얼핏 둘은 비슷한 것 같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문 제의 시발은 여기다. 감독은 일상성이라고 말했는데, 잡다한 가십성 에피 소드들이 일상성과 바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일상이란 말에는 제도와 리 얼리즘의 이중 함의가 있다. 일상은 제 스스로 일상이 되는가? 일상의 일 상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아무렇든지 널려 있는 이야기들을 그러모으면 되는가? ‘제도’로서 산부인과- 이를 시내에 있는 병원으로 직결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가 지닌 문제의 핵심은 현대 과학 및 이성 중심적 사고의 독재적 운행과 긴밀히 연결된다. 비인간화, 생명에 대한 왜곡된 관점, 남 녀 성차에 대한 편견 조장, 산모에 대한 배려 부재 등이 그것이다.

의사 한정연과 민혜석의 경우는 어떠한가. 생리·임신·출산을 질병으로 보는 태도와 명확한 차이를 보이는가? 자신할 수 없다. ‘위기에 처한 여 인’의 생명에 대한 경외감과 인간적 연대의식을 지니고 있다면 아마 다 음과 같은 문제제기에 빠질 리 없을 터이다. 수련의 문제, 출산 뒤 홀로 내팽개쳐지는 산모, 갓난아기와 엄마의 격리 수용, 산후조리와 우울증…. 영화에서 중심을 차지한 젊은 두 의사는 노숙한 두 여인, 박 간호사와 청 소부 아줌마를 주변으로 몬다. 조산원의 노련한 산파를 강력히 시사하는 두 여인의 충고는, 아주 무시되지는 않는 편이지만, 두 의사가 수행하는 첨단과학 시술과는 거리가 먼 구식의, 불확실하고 어딘가 위험한, 비과학 적이고 비위생적인(조금만 더 나가면 ‘야만의’) 민간요법처럼 비친다. 이건 과거 조산원이 병원이나 의사들에게 당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출산 과정에 남성들이 참여하는 건 마땅히 권장할 일이지만 이때 여성기 를 들이미는 건 생각해볼 일이다. 소재주의, 곧 센세이셔널리즘의 선정적 효과에서 온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학생부군신위>의 어수선한 장례식장을 <산부인과> 병원으로 그대로 옮긴 이 안이한 번안판을 보면서 난 많이 초조했다. 문제는 다시 작가의식, 철학이다. 그가 누군가. 거품 없이 적절한 예산으로, 기존 장르의 질서를 배격하고, 특히나 자율적 권 한을 움켜쥐고, 자기만의 영상을 구축하려고 벼르고 벼르는 야심찬 중견 감독 아닌가. (동숭씨네마텍2, 코아아트홀3, 영화마당2, 씨네하우스2, 롯 데월드1에서 상영중)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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