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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경의 우리맛 기행 |
1997년06월12일 제 1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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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투명한 단물에 하얀 밥알과 잣이 동동 떠 있는 식혜는 그저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아무리 타는 갈증이라도 금세 가라앉혀줄 느낌마저 준다. 한국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친숙하고 고마운 음료다.
우리 음식 가운데 차게 먹는 음료로는 여름철 화채(花菜)와 수정과(水正 果), 그리고 식혜(食醯)가 있다. 화채는 봄부터 시작해 제철에 피는 꽃이 나 과일을 소재로 갖은 모양을 내 먹는 여름철 음료이고, 수정과와 식혜 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먹는음료들이다.
이들 음료는 요즘 식품회사들이 다투어 캔으로 개발해 내는 바람에 자판 기의 버튼만 누르면 맛볼 수 있는 편리한 음료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음료들에 밴 선조들의 지혜와 멋을 느끼며 먹는 이들은 별로 없는 것 같 다.
가장 대중적이라 할 수 있는 식혜만 하더라도 격식을 갖춰 차를 대신해 내놓으면 목축임과 함께 약간의 요기가 되고, 더위는 물론 피로까지 개운 하게 가시게 하는 퍽 사려깊은 먹거리였다. 한참 더운 여름날 갑자기 찬 것을 마시면 탈이 나게 마련이지만 식혜는 그럴 염려가 없다. 동동 떠 있 는 밥알들이 자연스럽게 입안으로 흘러들어와 이들을 감촉하는 사이 잠시 숨을 돌리게 된다. 밥알을 씹으려 한모금씩 마시다보면, 그 배려가 감동 적이기까지 하다. 게다가 달착지근하게 우러난 식혜 국물은 몸에 열량을 보충해 피로를 풀어주고, 곁들인 경단이나 인절미를 몇점 집어 먹으면 시 장기도 가실 수 있었다.
식혜를 일반 가정에서는 ‘감주’ 또는 ‘단술’로 정답게 부른다. 지금 처럼 흔하지는 않았지만 어린아이들의 생일상이나 제상에도 빠트리지 않 았을 정도로 폭넓게 음용됐던 고유한 음료로 그 맥을 이어왔다.
식혜를 만드는 방법은 대체로 비슷하지만 내놓는 자리에 따라 꾸밈과 격 식은 달랐다. 전통음식 연구가인 황혜성씨는 한 글에서 “식혜를 떠서 유 자청을 약간 넣으면 향이 좋고, 석류철에는 석류알을 몇알 띄우면 색이 아주 곱다”고 적고 있다. 상상만 해도 맛깔스럽고 그윽한 멋이 있다. 이 처럼 꾸미는 솜씨와 정성에 따라 다양하게 맛과 모양을 가다듬어 먹었고, 일반적으로 떡이나 한과 등을 곁들여 먹었다.
서울 성북동의 한식 전문점 미진(02-745-0046)은 식사 뒤 후식으로 시원 한 식혜와 금방 삶아낸 찹쌀 경단을 곁들여 내는 집으로 이름나 있다. 그 깔끔하고 정갈한 분위기가 일품이다. 여느 가정에서나 이런 분위기가 그 대로 이어졌으면 하는 마음을 들게 한다.
간편하기로는 냉장고에 저장했던 캔을 꺼내 쟁반에 받쳐 내놓는 정도로도 괜찮겠지만, 조금 신경을 쓰면 더욱 그 맛을 즐길 수 있다. 캔을 따고 유 리잔이나 화채그릇에 담아 예쁜 받침에 고이고, 유자청이 없으면 잣이나 대추를 저며 몇조각 띄워도 그 조그마한 배려가 맛을 새롭게 할 수 있다.
시내 한과점 중에도 식혜를 그날그날 직접 만들어 내는 곳들이 있다. 값 은 캔보다 다소 비싸지만 정갈하고 제맛을 느낄 수 있다. 을지로 입구, 두산빌딩 지하의 ‘한가람’(02-757-8613)과 광화문 이마빌딩 지하의 ‘ 가야’(02-732-0918)는 시장할 때 경단이나 인절미 몇점을 곁들일 수도 있는 곳이다. 일부러 찾아가 먹는 것도 마음을 여유롭게 하는 멋이 아닐 까 싶다.
한가람은 단맛을 더 내기 위해 조금 지나치게 끓여, 밥알의 색깔이 짙고 밑으로 가라앉아 수저로 저으며 먹어야 하는 소박한 감주에 가깝다. 가야 는 쌀알이 알맞게 삭았을 때 건져냈다가 상에 낼 때 띄워줌으로써 밥알이 희고 단물도 더 맑아 반갓집 격식을 갖춘 세련된 맛이 있다.
식혜는 캔에 들은 것을 먹을 때도 흔들어 밥알과 함께 씹어먹는 음료여야 하는데, 밥알이 하도 우러나 씹히는 질감이 마치 종잇조각처럼 심심해 유 감이다.
신세대 주부도 쉽게 만든다
식혜는 만드는 방법이 단순해 더욱 널리 음용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젊은 이들도 한번 설명을 듣거나 어른들의 시중을 들며 자연스럽게 배운다.
식혜에 필요한 재료는 식품가게에 다 있다. 보리를 싹틔운 기름은 물론 경단을 만드는 찹쌀가루와 콩고물까지 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엿기름을 낼 때 건지를 완전히 건져내고 맑은 물만 걷 어내 써야 한다는 점이다. 보온할 때도 밥알이 알맞게 삭으면 일부 건져 내 찬물에 행궈 물을 쪽 짠 다음 따로 보관했다가 식혜 국물에 띄워야 잘 뜨고 모양도 있다.
경단은 찹쌀가루를 반죽할 때 누르면 부서질 정도로 되게 반죽해야 삶았 을 때 쫄깃하다. 경단 속에 건포도를 한알쯤 넣으면 더욱 맛난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