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를 바꾼다
1997년06월12일 제 161호 한겨레21

동국제강 인천제철소

앗! 컴퓨터에 애써 쳐놓은 전표가 몽땅 날아가 버렸다. 3시간 동안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집중해서 쳐놓았는데. 잠깐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사 이에 물거품이 되다니….

동국제강 인천제강소 총무팀 유창근 대리는 회사의 전표 처리 일을 맡고 있다. 매달 5일에는 현장직 동료들의 임금, 12일에는 작업비, 그리고 25 일에는 관리직 동료들의 임금을 처리한다. 중간중간 소소하게 나가는 각 종 경비의 전표도 그의 손을 거쳐야 한다.

한번 전표작업에 들어가면 도중에 절대로 자리를 비울 수 없다. 3분 동안 작업을 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컴퓨터 프로그램이 윈도상태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경비지출 내역의 보안을 지키기 위해 전산망이 그렇게 짜여진 것이다. 그러니 공연히 여유를 부리다간 공든 탑이 일거에 무너진다.

죽어나는 건 전표를 처리하는 직원들이었다. 화장실 가는 것도 무섭고, 전화를 받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동료들끼리 잡담은 더더욱 꿈같은 일이 었다. 어쩌다 친구가 찾아와도 편하게 짬을 낼 수가 없었다. 갑자기 정전 이라도 되면 그날 일은 완전히 공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표 하나에는 적게는 10여개, 많게는 2백여개 항목 이 붙어 있어 항목마다 금액을 쳐넣는 것도 고역이었다. 매달 달라지는 건 금액뿐이고, 그마저도 바뀌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데도, 직원들은 기 계같은 단순작업을 되풀이해야만 했다.

유 대리는 이런 문제를 더이상 덮어둘 수 없었다. 동료들과 상의를 거쳐 회사의 전산 담당자를 찾았다. 약간의 마찰도 예상했다. 그런데 뜻밖이었 다. 전산 담당자는 왜 여지껏 그렇게 힘들여 일했냐는 투였다. 해결책은 너무도 간단했다. 전 달치 전표를 달만 바꿔 복사해와 금액만 고쳐쓰면 되는 거였다. 그러면 작업시간도 줄어 중간에 입력한 게 날아가는 불상사 도 예방할 수 있었다.

“전표의 굴레에 붙들렸던 것은 프로그램 탓이 아니라, 타성에 젖어 문제 를 개선하려는 의지를 갖지 않았던 우리 자신 때문이었던 거죠.” 유 대 리의 전표처리 개선 소감이다.

유강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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