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1997년06월12일 제 161호 한겨레21

점봉산 나물꾼들의 희망의 삶

(사진/점봉산에는 산나물이 널려 있지만 누구에게나 보이지는 않는다. 할머니들은 오랜 경험으로 산나물 자리를 꿰뚫고 있다.)

북으로는 설악산 대청봉을 이고, 남으로는 오대산 준령을 발판 삼아 우뚝 솟은 백두대간의 허리 점봉산. 험한 산줄기를 타고 올라온 동해의 소금바 람이 한동안 가쁜 숨을 몰아쉬는 이곳에선 요즘 산나물을 캐는 나물꾼들 의 손놀림이 바쁘다. 숲속 곳곳에서 허리춤에 대리끼(캐낸 나물을 담는 비닐포대)를 찬 아주머니들의 잽싼 나물걷이가 한창이다.

점봉산 양쪽의 주문진과 홍천에서 올라온 나물꾼은 이맘때면 아예 산사람 이 된다. 산꼭대기 부근의 움막에 눌러앉아 4월부터 6월까지 숲속을 헤집 는다. 움막이라야 고사목 20여개로 기둥을 삼고, 나뭇가지로 대충 지붕을 얹은 뒤 비닐을 포개 놓았을 뿐이지만 움막치고는 제법 후둣하다. 바닥에 는 돌을 쌓고 그 위에 진흙을 발라 구들까지 갖췄다.


농번기 맞은 나물꾼들의 분주한 하루

박병호(40)씨는 이 움막의 대장이다. 나물꾼들 사이에선 ‘점봉산 산신령 ’으로 더 잘 통한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산나물이 나는지 손바닥보듯 훤히 꿰뚫기 때문이다. 9년 가까이 동네 골목 누비듯 점봉산을 훑고 다닌 덕이다. 박씨는 요즘 10여명의 나물꾼들과 함께 산나물을 채취하느라 눈 코 뜰 새가 없다. 그는 “나물꾼에겐 이맘때가 가장 바쁜 농사철”이라며 웃는다.

박씨는 애초 소를 치던 농부였다. 농어민후계자 정착자금으로 6백만원을 대출받아 소를 쳤으나 빚더미에 올라앉고 말았다. 83~84년 이태에 걸쳐 소값파동을 겪고나니 1천5백만원의 빚만 남았단다. 그때부터 박씨는 4년 동안 유랑생활을 했다. “아내랑 시골이며, 도회지를 돌며 생선을 팔았죠 . 군부대에서 잔밥을 받아다 돼지도 길러보고요. 그런데 하는 일마다 틀 어지더라구요. 결국은 인생의 종착역이라는 탄광까지 떠밀려 들어갔죠.”

박씨는 지난 89년 아내를 데리고 쫓기다시피 이곳 점봉산으로 들어왔다. 탄광촌에서도 살길이 보이지 않던 차에, 어린시절 산나물을 뜯어먹던 기 억이 난 것이다. 마침 유기농법 바람이 불던 때라 잘 하면 산나물에 기대 먹고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보릿고개가 닥치면 칡잎으로 보리개떡을 싸서 쪄먹기도 하고, 곤드레를 뜯어다 푹 삶아서 죽을 쒀 먹기도 했지요. 그래서인지 산에 뿌리를 내리면 굶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산 나물을 내다 팔면 돈이 될 것도 같았구요.”

산나물은 인생 막다른 골목에서 그의 희망이 되어 다가왔다. 하지만 그 희망은 금세 꺾이고, 또다시 절망. 나물을 뜯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 다. 산속에 깊이 들어간다고 해서 나물이 지천으로 깔려 있는 것이 아니 었다. 잡풀 속에서 여기저기 띄엄띄엄 고개를 삐죽이 내밀고 있는 산나물 을 골라내려면 앉은뱅이 걸음으로 온 산을 뒤지고 다녀야 했다. 산나물의 종류도 가지가지여서 어릴 때 어깨 너머로 익힌 눈썰미만으로는 돈이 될 만한 산나물을 뜯는 것도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쫓기듯 산으로 밀려온 처지를 젊은 혈기가 받아들이지 못했다. 참나무에 이마를 찧으며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고, 모든 것을 포기할 요량 으로 나물을 삶는 드럼통을 도끼로 내리치기도 했다고 한다. 아내의 손을 잡아 이끌며 산에서 내려가자고 애원하기도 했다. “아내까지 산에 데려 와 고생시키고 있다는 자괴감을 견딜 수 없었죠. 여기서마저 떠나면 우리 는 죽는다는 아내의 눈물어린 호소가 없었더라면 지금까지 버틸 수 없었 을 겁니다.”


움막을 보금자리로 여기는 사람들

나물철이 오면 움막에서 2~3개월은 옴짝달싹도 할 수 없다. 날씨가 수시 로 변덕을 부리는 통에, 산나물을 말리는 일에 한눈을 팔 수가 없기 때문 이다. 그러다 보니 산밑에 두고온 아이들이 그리울 때가 많다. 지금이야 아이들이 커서 제 앞가림을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린 아이들 걱정 에 속을 끓이곤 했다. 오늘은 저녁을 해먹었을까. 대충 때우고 잠자리에 든 것은 아닐까. 내일 점심도시락 싸갈 반찬도 없을 텐데. 그때 그 그리 움이 점봉산 정상에 덩그러니 놓인 나무벤치에 그대로 담겨 있다. 사실 벤치라기보다는 엉덩이만 걸칠 수 있게 만든 키작은 평행봉에 가깝다. 가 래떡 굵기만한 고사목 가지를 사람키만 하게 손닿는 대로 잘라 나무등걸 에 걸쳐 놓고는 대못으로 한번씩 박아놓았을 뿐이다. “아내가 밤만 되면 산 정상에 서서 산밑에 있는 집의 불빛이 꺼질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거 예요. 보다 못해 편하게 앉아서 불빛을 지켜보라고 벤치를 만들어줬죠” 해가 가면서 박씨의 산나물 인생이 농협 수매과정에서 점점 알려지기 시 작했다. 4월부터 6월까지는 산나물, 여름과 가을에는 산약초와 송이버섯 를 따는 일도 자연스럽게 몸에 배기 시작했다. 근처에서 그의 나물찾는 비법을 배우러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면서 점봉산 움막은 나물꾼들의 보금자리로 떠올랐다. 어느새 사람들은 그를 ‘점봉산 산신령’이라고 부 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나도 모르게 점봉산에 빠져버렸다”고 말한 다. “집에 내려왔다가도 얼른 산에 올라가고 싶어요. 집에 있으면 현기 증이 나고 맥이 빠지고 그래요.”

(사진/점봉산 움막의 대장 노릇을 하는 박병호씨는 9년째 산나물을 따고 있다. 묵나물을 바라보는 박씨의 표정이 흐뭇하다.)

움막의 아침은 빠르다. 새벽 5시면 일어나 아침을 짓는다. 모든 것이 산 속에 있는 자연 그대로를 이용해 이뤄진다. 밥이나 국도 산나물을 삶고 남은 숯으로 짓는다. 국은 산에서 막 뜯은 곰취나 곤드레에 된장을 풀어 만든 장국이다. 밑에서 지고 올라온 몇 가지 마른 반찬이 있긴 하지만, 가장 큰 반찬은 역시 곰취나 두릅 따위다. 이것들을 쌈장에 그대로 찍어 먹는 게 맛도 좋고 편하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면 할머니들이 허리춤에 대리끼를 차고 산으로 흩어 진다. 산나물이 있는 곳을 잘 아는 박씨가 길을 안내한다. 낮 12시와 저 녁 5~6시께 할머니들이 산막에 내려와 계근(산나물의 근수를 잼)을 한다. 계근하고 나서 쏟아 놓은 산나물은 곰취, 박쥐나물, 종이나물 등 종류에 따라 나눈다. 점봉산에서만 자라는 수리취와 장광나물은 박씨가 찾아낸 고급 산나물이다.

할머니들이 산으로 올라간 사이 움막에서는 산나물을 삶기 시작한다. 드 럼통 가운데를 가른 뒤 양쪽으로 벌려 만든 솥에서 반숙이 될 정도로 나 물을 익힌다. 삶은 산나물에 아침이슬을 맞히고 다시 바람과 햇볕에 말리 는 과정을 4~5일 반복하면 묵나물(산채를 말린 것)이 완성된다.


산채를 묵나물로 만드는 힘겨운 과정

이렇게 단순한 일과를 마치고 나면 저녁 8시께 잠자리에 든다. 피곤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적막한 산속에서 딱히 할 일이 없어서다. 가끔 촛불을 켜놓고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안주삼아 소주를 마시는 것이 유일한 낙이 다. 술이 얼큰해질 때쯤이면 너나 없이 민요 한자락씩이 읊조린다. 홍천 에서 올라온 안현숙(67) 할머니의 <고사리 고비 타령>은 일품이다. “우 리 어머니가 날 가졌을 때 고사리 고비를 먹었는지, 날이 갈수록 꼬불꼬 불해. 이년 팔자가 꼬불꼬불해. 고사리 고비로구나, 고사리 고비로구나. ”

할머니들은 노랫가락에 맞춰 어깨를 들썩거린다. 어깨놀림에 들어간 흥과 가사에 담긴 한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어릴 때부터 나물을 채취하며 끼 니를 이어온 할머니들의 넋두리다. 나물 끝이 돌돌 말린 고비에는, 보릿 고개를 넘기기 위해 나물을 따러 산속을 떠돌아다녀야 했던 할머니들의 삶이 그대로 투영돼 있는 것이다.

주문진에서 올라온 이아무개(80) 할머니는 나이가 가장 많다. 그렇지만 ‘미스 리’로 불린다. 할머니의 기운을 북돋워 주기 위한 산사람들의 배 려다. 30kg이 넘는 산나물을 지고 내려올 때면 할머니의 허리가 구부러져 코가 땅에 닿는다. 산나물을 내려놓고는 “어드렇게 올라왔어. 힘 들었지 . 나도야 올라올 때 죽을 뻔했어야. 내려갈 걱정이 태산이야”라며 반색 을 한다.

그 노구를 이끌고 험한 산을 올라온 사연이 못내 궁금하다. 장정이라도 맨몸으로 올라오는 데 2시간 반이 걸리고, ‘깔딱고개’라고 불리는 급경 사 지역이 군데군데 있어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정작 사연을 물어 보면 눈길이 마주치는 것을 피한다. 그리곤 엉뚱하게 대학 방학이 언제냐 고 묻는다. 할머니가 찔끔찔끔 털어 놓은 사연은 이렇다. “한양대와 건 국대에 다니는 손자 등록금 대려고 왔어. 방학때면 그놈들이 꼭 온다고 했는디. 사람은 교육을 받아야해…. 사람은 교육을 받아야해…. 그래야 사람 구실을 하거든.” 아들이 대학교수라는 말도 살짝 덧붙인다. 그뒤로 는 입을 꾹 다문다.


80노인의 손자사랑 담은 산나물 채취

할머니들이 그 힘든 산나물 채취를 할 수 있는 것은 체력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습관이고 피붙이들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면서 산나물 채 취는 이곳 점봉산 나물꾼들에게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그들에게 점 봉산은 삶 그 자체고 삶을 키우는 텃밭인 것이다.

이용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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