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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
1997년06월12일 제 1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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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그는 망원렌즈를 사절한다. 24mm렌즈만을 고집한다. 사람들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가서 구원의 메시지를 찍고 싶기 때문이다.)
기도가 먼져냐, 셔터가 먼저냐. 신부는 그 순간 셔터를 선택했다. 죽음 앞에 선 노인은 헉헉거리며 마지막 고통과 싸우고 있었다. 신부는 그런 노인의 코 앞까지 카메라를 대고 미친듯이 셔터를 눌러댔다. 그 5분 동안 신부는 오로지 사진작가일 뿐이었다. 갑자기 노인의 입에서 누릿한 오물 이 왈칵 뿜어져 나왔다. 이승에 던지는 마지막 구토였다. 신부는 그 순간 까지도 셔터를 눌러댔다.
정재순(66) 신부(대구 용성본당)의 사진모음집 ‘나인의 길’은 그렇게 완성됐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쓴웃음이 난다. 신부가 죽어가는 이 앞에서 기도는 올리지 않고 사진만 찍어댔으니. 카메라를 들지 않은 한 손으론 연신 묵주를 돌리긴 했지만, 어디 그게 신부의 도리인가. 두고두 고 속으로 참회할 뿐이다. 하느님 용서하소서!
“죽어가는 환자 있으면 연락 주세요”
그렇게까지 극성을 부린 까닭이 있긴 하다. 그때 그는 ‘나인의 길’을 이끌 큰 제목으로 ‘부활’을 잡았다. 한데, 정작 거기에 맞는 한 컷의 사진을 찍지 못했다. 부활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뜻이니, 죽어가 는 이의 모습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죽을 징조가 보이는 환자가 있으 면 꼭 연락을 주세요.” 중증 나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돌며 그런 괴상망측한 부탁을 하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날은 그렇게 맞은 임종의 기회였던 것이다.
그는 시신 안치실까지 따라 들어가 죽은 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병원 사람들은 그런 그를 어이없어 했다. 원장은 “어떻게 신부님이…” 라며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원성 탓이었을까. 일을 마쳤다는 기쁨 에 잠시 넋을 잃는 순간, 카메라가 스르르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퉁, 딸까닥. 카메라는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졌고, 필름을 보호하는 캡까지 열 렸다. 신부는 그때서야 기도를 올렸다. “하느님, 제발 이 필름을 살려주 십시오.” 다행히 필름은 멀쩡했다고 하나, 역시 신부로서 쑥쓰러운 일이 었다.
‘나인의 길’은 나환자들의 처절한 모습으로 이어진다. 성한 손가락이 하나도 없어 손바닥으로 알약을 받쳐든 모습, 정강이부터 문드러져 신발 이 필요없는 두 다리, 어깻죽지만 남은 팔에 고무줄을 동여매고, 거기에 숟가락을 매달아 밥을 먹는 할머니. 그는 그들의 그런 모습에서 죽음이 곧 구원임을 보았던 것일까. 신부는 그 사진들 옆에 “육체는 질질 끌려 가는 무거운 십자가. 앞으로 얼마를 더 용서받아야 남은 형벌을 면할까” 라고 썼다.
그는 사진을 통해 “음지에서 사는 사람들 속에 숨겨진 구원의 메시지를 양지로 가지고 나온다”고 말한다. 그 메시지를 담아오기 위해 사람들에 게 가장 가깝게 다가선다. 24mm 렌즈만을 고집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망원렌즈는 절대 사절이다. 사람의 코 앞에서 셔터를 눌러야 사진이 되는 렌즈로 구원의 메시지를 찍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카메라는 복음을 전하는 강론이다.
그가 신부가 되기까지 걸었던 길도 유별나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성당 에 발을 들였다고 한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에는 세레를 받았고, 커서 는 사제가 되리라고 작심했다. 그러나 양복재단을 했던 아버지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서 그걸 한사코 반대했다. 아주 완강한 반대였다고 하는데 들어보니 정말 그렇다. 엄동설한에 옷은 커녕 신발도 없이 맨발에 누더기 를 걸친 채 쫓겨나기도 했고, 끼니를 거르기도 많이 했다고 한다. 춥고 배고프면 성당에 발길을 끊고 교회로 오라는 강력한 압력이었다. 일종의 종교적 박해였던 셈이다.
‘종교적 박해’이기고 신부의 길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소년은 사제가 되기 위해 가출을 감행한다. “서울 용 산에 가면 가톨릭재단에서 세운 소신학교(중고등 과정 6년제)가 있는데 밥도 먹여주고 잠도 재워준다는 거였다. 그곳을 마치고 대신학교(카톨릭 대 신학부 전신)에 들어가 신부가 될 생각이었다.” 사정을 안 수녀가 서 울 가는 기차표 한장을 구해줬고, 소년은 술 지게미 한 움큼을 삼키고 기 차에 몸을 실었다. 날은 추웠고, 배가 고팠던 것이다. 그때 간밤에 눈물 을 섞어 부모 앞으로 편지를 썼다. 유서 삼아 남긴 그 편지의 내용은 지 금 가물가물하다. “아버님 저한테 한 번만이라도 웃어주세요”라는 구절 이 있었던 것만 기억난단다.
아버지와의 화해는 그가 신부가 되고서야 이뤄졌다. 소신학교를 마치고 학도병으로 입대해 전쟁을 치렀다. 4년간 복무하는 동안에 목도한 인간사 의 비극은 그의 사제행을 더욱 굳게 했다. 제대 뒤 마저 대신학교를 마치 고 1961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바로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사제복을 입은 아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리한 종교전쟁은 그렇게 끝났다.
사진에 손을 댄 동기란 게 참 묘하다. 임종 앞에서 한 손에 묵주를, 다른 한 손엔 카메라를 든 것과 비슷하다. 종교적인 책임감과 조금은 이기적인 욕심. 신부가 되어 강론을 하면서 깊은 한계를 느끼곤 했다고 한다. 20여 분 동안의 강론으로는 하고 싶은 얘기를 제대로 전하기 힘들었다는 것이 다. 그래서 고민 끝에 얻은 결론이 보여주자는 거였다. 영상시대에 영상 으로 설교하리라. 그날 즉시 작동원리나 조작법도 모르는 채로 카메라를 샀다. 그러면서 속으로 선언했다. ‘일 년 안에 개인전을 열리라.’ 그는 당돌하게도 국전 초대작가를 찾아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내가 타도 1호 로 삼고 있는 표적이 바로 당신이오.”그에겐 애초 성과 속을 나누는 논 리가 통하지 않는 것일까.
정 신부는 그때부터 말씀과 사진을 함께 생활로 삼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했던 약속을 지켰다. 일 년만에 순교자들의 이미지를 담은 ‘새남터의 목 소리’라는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국전 초대작가에게 걸었던 승부 도 계속했다. 그러기 위해선 남들이 못찍은 걸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병환자들 속으로 들어간 것은 그 때문이었다. 소록도를 비롯한 나환자 들 수용소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마침 나환자들 가운데 중환자들은 경 북대 부속병원으로 수술을 받으러 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작업은 한 결 쉬웠다.
그러나 그것은 신부가 아니면 흉내낼 수 없는 작업이었다. 사제라는 신분 이 아니었다면 나환자에게 접근할 기회조차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나환 자들은 세상에서 카메라를 가장 싫어한다고 한다. 그 역시 처음에 멋모르 고 환자들 앞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차가운 시선을 느껴야 했다. 단박에 “저놈 자식, 또 우리 사진 찍으러 왔군”이라는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로만칼러가 아니었다면 돌멩이가 날아왔을 것이다.
작전을 바꿨다. 1년여 동안 카메라없이 찾아가서 운동도 같이 하고 밥도 같이 먹으며 벽을 낮췄다. 그렇게 붙어살다시피 하다보니 어느덧 친구가 됐다. 그때 카메라를 들이댔다. “자, 신분증 사진들 없지요? 내가 찍어 줄게요.” 환자들은 그제서야 뭉툭한 팔이며 발목이 달아나고 없는 다리 를 스스럼없이 내밀었다. ‘나인의 길’은 그렇게 탄생했다.
“다시 태어나면 사진작가가 돼야지”
그의 카메라는 항상 외지고 어두운 곳을 담는다. 나환자들을 떠나 이번엔 정신병동을 찾아들었다. 정신은 멀쩡한데 육신이 썩어 문드러진 사람들을 찍었으니 거꾸로 육신은 멀쩡한데 정신이 성하지 않은 사람들을 찍기 위 해서였다. “아저씨 연애 한 번 하자”고 달려드는 여자 환자에게 “오늘 은 기운이 없어”라며 너스레를 떨며 사진을 찍었다. 뇌성마비 소년소녀 들이나 난지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그의 카메라에 담겼다. 그 러다보니 정보기관은 그를 불순 신부로 찍기도 했다.
그는 요즘엔 기력이 달려 사진을 마음대로 찍지 못한다. 피사체에 초점을 맞추고 셔터를 누를 순간을 기다리는 게 여간한 고역이 아니다. 그렇게 대여섯 번을 하고 나면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흥건하다. 어떨 땐 쓰러지기 도 한다. 암실에서 금세 나오지 않으면 사람들이 몰려와 문을 두드리곤 한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되뇌인다. 이렇게 죽어 다시 태어나면 사진작 가가 돼야지. 그는 사제복 대신 작업복에 카메라를 들고 전장을 누비는 종군작가가 되고 싶단다. 그 속에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을 카메라 에 담고 싶다.
사진 박승화/ 프리랜서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