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재
1997년06월12일 제 161호 한겨레21

협박정치, 벼락을 맞다

옛민자당 대표 시절 김영삼 대통령은 ‘중대결심’을 비교적 자주 한 편 이었다. 물론 중대결심이 현실화된 적은 없지만 그때마다 노태우 대통령 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당중앙’이 되어 치른 15대 총선이 민자당의 패배로 끝난 직후 그 는 정주영 당시 국민당 대표와 은밀히 만나 정치적 제휴 문제를 논의했다 . 그 직후 그는 비등하는 선거책임론에 맞서 대통령후보 경선체제로의 전 환을 노 대통령에게 강권했다. 그게 3월30일이었다. 대통령은 격렬히 반 발했다. 그러나 일주일도 채 못돼 5월 전당대회를 수용했다. 책임론도 당 연히 꺾였다. 이어 역시 노 대통령을 움직여 출마 움직임을 보이던 박태 준 최고위원을 주저앉혔다. 안기부가 동원됐다. 이로써 대세는 결정됐다. 대통령이 누구 편인지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때 노 대통령을 끝없이 뒷걸 음치게 했던 것은 바로 집단탈당 위협이었다. ‘(경선에서) 승리만 있을 뿐 패배는 생각지 않는다’는 그의 발언은 그 한 표현이었다. 정주영 국 민당 대표는 결국 탈당의 현실성을 보여주는 소도구로 동원됐을 뿐이었다 .

당시 일부 언론은 이를 ‘김영삼의 협박정치’라고 규정했었다. 그런 사 례는 경선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3당합당 직후 박철언 의원과의 갈 등때도 그랬고 내각제 합의각서 파문 때도 그랬다. 툭 하면 결행했던 당 무거부 때문에 그에겐 ‘상습가출 소년’이라는 언짢은 별명도 따라붙었 다.

그럼에도 그의 ‘협박’이 가능했고 실효를 거뒀던 것은 노태우 정권의 원죄였던 12·12군사반란, 5·17쿠테타 때문이었다. 퇴임후에 대한 불안 은 생떼같은 억지에도 무너지게 했다. 그리고 군사정권의 적자보다는 민 주화투쟁의 지도자가 승계하기를 바라는 국민적 여망은 큰 원군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후 그의 입에서 ‘중대결심’이라는 언급이 사라졌다. 더이상 쟁취할 것이 없어서겠지만 사실 협박 차원에서 이 말을 던질 만한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적절할 것같다.

그런데 5·30담화에서 그는 ‘중대결심’이라는 칼을 빼들었다. 당연히 어떤 이득을 취하기 위해 누구를 협박하는 것인지가 논란이 됐다. 대충 결론은 김대중 국민당 총재의 대선자금과 관련한 입을 봉쇄하기 위한 것 으로 났지만 이에 대한 여론은 꽤나 착잡했다. 누가 앞장서 대선자금 공 개를 요구했는지 여부를 떠나 이 요청의 주체는 국민이었기 때문이고 또 김 총재의 입만 막으면 국민의 입도 막을 수 있다는 발상 때문이며 세째 로는 협박의 대상에 국민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비춰질 수 밖에 없는 태 도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차남인 현철씨의 구속을 자신의 큰 결단인 것처럼 내세웠다. 그리고 ‘자식까지 구속시켰는데 못할 게 뭐 있겠느냐’는 투의 으름짱까 지 놓았다. 엄격한 법집행의 본분은 사라졌고 지하세계의 오기와 복수만 남아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는 아들의 사법처리 논란이 한참이던 지난 2월 기자회견에서 그는 ‘자 식의 허물은 아비의 허물’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현철씨를 사법처리 하면 대통령의 하야라는 헌정중단 사태로 발전할 수 있으니 현철씨에 대 한 사법처리 요구만은 거둬달라는 간청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번 담화 에선 이런 등식이 완전히 사라졌다. 하야라는 극단적 형태는 아니더라도 책임지는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아들의 죄와 벌은 최고통치 권자로서 전횡의 도덕적 근거가 돼버렸다.

그의 ‘중대결심’ 담화가 끝난 직후 청와대 경내의 한 시설물에 벼락이 떨어졌다. 말좋아 하는 사람은 ‘벼락맞은 중대결심’이라는 제목도 떠올 릴 법 하지만 이제 벼락의 정치적 해석이라는 기이한 소재가 국민적 논점 이 되어 버렸다.

이제 하야 문제가 당위로까지 이야기되고 있는 마당이니 협박정치를 따지 는 게 무슨 소용이랴만은 그래도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데 특별한 능력 을 가진’ 그에게 한 오라기 미련은 있어 한 분 아버지를 소개하고 싶다.

지난 3월29일 문화체육부 문화정책과 김 충 사무관(39)은 평소처럼 아들 이 특수교육을 받고 있는 충북 제천재활학교로 내려갔다. 그는 언어능력 이 없는 아들을 즐겁게 해주려 매번 그러했던 것처럼 아들이 보는 앞에서 핸드볼 골대를 잡고 회전 묘기를 보여주었다. 그러다 아차 실수로 추락해 목뼈가 부러지면서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로부터 두달 뒤인 지난 5월 26 일 그는 이승을 떠났다. 인지능력이 없는 아들은 지금도 토요일만 되면 운동장에 나와 철봉 묘기를 보여주던 어버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힘겹게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이 나라의 아버지가 보고싶다.

한겨레21 편집장 곽병찬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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