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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하는 재벌 |
1997년06월12일 제 1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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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최종현 회장.)
“70세를 넘으면 판단력이나 기억력이 떨어지는 만큼 경영일선에서 물 러나는 것이 바람직하다.”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은 그동안 여러 차례 ‘ 고희(古稀) 은퇴론’을 피력했다. 그의 이런 발언은 지난 92년 모 재벌그 룹 창업주의 정치참여가 계기가 됐다고 한다. 지난 93년 말에는 “오는 2 000년에는 내 일과 중 5%만 경영에 할애하겠다”는 말도 했다. 29년생인 최 회장은 올해로 68세다. 그의 말대로라면 은퇴까지는 불과 2~3년밖에 남지 않았다.
‘고희 은퇴론’실천에 옮겨질까
현 시점에서 최 회장이 자신의 말을 실천에 옮길지, 무시해 버릴지 단정 짓기는 어렵다. 최근 들어 최 회장이 후계문제를 언급한 적은 없는 것으 로 전해진다. 재벌총수가 자신의 은퇴시기를 미리 언급하고 실천에 옮긴 전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구자경(72) LG그룹 명예회장은 회장 시절 부터 “일흔살이 넘으면 경영일선에서 은퇴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 는 70살이 되던 지난 95년 2월 회장직을 아들(구본무 현 LG회장)에게 물 려주고 은퇴했다.
재계에서는 최 회장의 성품으로 볼 때 그가 자신의 말을 완전히 빈말로 돌리지는 않을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그는 재계에서 신사로 통한다. 그의 합리적이고 모나지 않은 성품을 두고 하는 말이다. 솔직하고 서민적 인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또 재벌총수로서는 드물게 학식(서울대·미 국 시카고대학)과 경영능력을 겸비했다. 그의 이런 상식과 합리를 중시하 는 태도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재계의 본산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직을 세번씩이나 연임할 수 있는 배경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최 회장은 흔히 1.5세 경영인으로 불린다. 창업주이자 친형인 최종건 회 장이 지난 73년 지병으로 사망하자 뒤를 이어 선경의 경영대권을 승계했 다. 그후 그에게는 ‘기업들 목소리만 일방적으로 대변한다’거니 ‘정경 유착을 통한 잇단 기업인수로 고속성장을 했다’거니 하는 꼬리표가 따라 다닌다. 그러나 그가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수직계 열화를 완수하는 뚝심과 미래의 유망 성장사업인 정보통신에 남보다 앞서 뛰어드는 발군의 안목으로 오늘날 선경을 계열사 45개에, 매출이 40조원( 97년 목표)에 이르는 재계랭킹 5위로 끌어올린 장본인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난 53년 한국전쟁 직후 수원에서 직기 4대로 차린 ( 주)선경(당시 선경직물)을 포함해 창업 시절 설립된 회사 가운데 지금까 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는 (주)선경, 선경인더스트리, 워커힐 등 이 꼽힌다. 그룹의 간판구실을 하고 있는 유공, SK텔레콤을 비롯해 SKC, 선경건설, 선경증권 등 나머지 대부분은 최 회장이 직접 설립했거나 인수 한 회사들이다. 그는 독자적 경영원리인 선경경영관리체계(SKMS)와 그 실 천이론인 슈펙스(Super Excellent)를 창안해 현실에 정착시키는 능력도 과시했다.
그렇다고 후계구도 처리에서 최 회장이 완전히 홀가분한 입장은 아니다. 선경의 씨를 뿌리고 토대를 마련한 창업주의 지분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최 회장 집안은 우애가 남달랐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경영권을 이어받 은 뒤 스스로를 형님이 남긴 3남4녀와 자신의 2남1녀를 합한 5남5녀의 가 장으로 표현했다. 또 74년에는 모 신문 신년호에 쓴 ‘형제’라는 칼럼에 서 “아버지를 잃은 조카들에게 형님이 살아 계실 때 이상으로 더 잘해야 한다는 것이 형님의 유훈이라고 믿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아들이든 조카든 가리지 않겠다”
그는 평소 “경영능력이 있는 대주주는 경영인으로 키워야 한다. 적임자 라고 판단되면 아들이든 조카든 가리지 않고 경영을 맡기겠다”며 아들- 조카 기회평등론을 폈다. 그는 “앞으로 선경을 경영할 수 있는 사람은 가족이 아닌 전문경영인에서 나올 수도 있다”는 말도 했다. 그러나 그룹 안팎을 막론하고 차기대권이 전문경영인에게 넘어가리라고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최 회장은 평소 한국적 기업 시스템으로 ‘경영인과 대주주 간의 조화’를 강조해 왔다. 오너와 전문경영인의 분리로 특징되는 미국 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미국식은 경영의 투명성이 높은게 장점 이다. 그러나 장기비전에 의해 과감한 투자결정을 하기는 어렵다.” 그룹 경영기획실 PR팀 관계자의 설명이다.
최씨 가문의 남자 2세로는 창업주의 아들인 최윤원(47) 선경인더스트리 부회장, 최신원(45) (주)선경 부사장, 최창원(33) 선경인더스트리 이사, 최 회장의 아들인 최태원(37) (주)선경 및 유공 상무, 최재원(34) SKC 이 사 등 다섯이 있다.
창업주의 맏아들인 윤원씨는 지난 78년 선경인더스트리 부장으로 입사한 뒤 88년 부사장이 됐다. 그러나 건강 등 일신상 문제로 경영에서 사실상 손을 떼고 93년 부회장으로 물러앉았다.
신원씨는 지난 88년 (주)선경 경영기획실 이사를 시작으로 상무, 전무를 거쳐 지난해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해병대 출신으로 사람이 순수하다는 평을 받는 최 부사장은 대권보다는 선친이 죽기 직전 인수한 워커힐에 더 큰 애착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 회장의 맏아들인 태원씨는 신일고와 고대 물리학과를 거쳐 미국 시카 고대에서 경제학을 배운 뒤 91년 그룹의 미주 경영기획실에서 경영수업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지난 92년 제2이동통신사업 수주전에 깊숙이 관여 했고, (주)선경 상무로 그룹 경영기획실 신규사업개발팀장을 맡고 있는 지금도 94년 초에 인수한 SK텔레콤(옛 한국이동통신) 등 그룹의 정보통신 사업을 직접 챙기고 있다. 지난해 유공의 상무까지 겸하게 됐을 때는 호 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라는 평과 함께 최 회장이 그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후계구도를 짜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최 회장이 큰 누나의 아들인 표문수씨를 SK텔레콤 전무에 포진시킨 것도 태원씨를 위한 배려로 풀이되고 있다. 경영기획실을 중심으로 경영수업을 가장 착실하게 받고 있고 그룹의 2대 핵심사업인 에너지·화학과 정보통신 분야에 모두 손을 뻗치고 있는 태원씨가 현재로서는 가장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태원·재원·창원이 가장 유력”시각도
그러나 그는 부인 노소영씨와 함께 미화 19만달러 밀반출사건에 연류돼 지난 93년 초부터 3년여 동안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은 데 이어 95년 말부 터는 다시 장인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12.12 및 5.17, 비자금사건으로 이 미지가 크게 실추됐다. “그룹 안에서는 이들 사건의 상처가 태원씨를 평 생 따라다닐 것이라는 점을 들어 이런 태원씨를 후계자로 삼는 것은 그룹 으로서 너무 큰 모험이라는 ‘태원씨 불가론’도 있다”고 그룹의 한 관 계자는 말한다. 그러나 최 회장은 사돈인 노태우씨가 곤욕을 치를 무렵 자택으로 가족들을 불러 모아놓고 “며느리도 내 자식이다. 우리 가족들 이 돌보지 않으면 누가 보호하겠는가”라며 침체된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고 한다. 또 지난 96년 초 사장단회의에서는 “김 대통령이 `다른 것은 몰라도 ‘현철이에 대한 이야기는 내게 하지 말라’고 하더라”며 태원씨 비판론을 겨냥한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최 회장의 둘째아들인 재원씨는 지난 94년 SKC 사업개발팀장으로 첫발을 내디딘 뒤 그룹이 해외 역점사업 중 하나인 미국 조지아주 필름공장 건설 등 신규사업에 관여하고 있다. 재원씨는 형 태원씨와 같은 고등학교와 대 학교를 나온 뒤 미 스탠포드대와 하버드대 MBA과정을 이수했다.
최종건 창립 회장의 막내아들인 창원씨는 나이가 가장 어리지만 서울대 심리학과을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대에서 공부한 데서 엿볼 수 있듯이 뛰 어난 자질로 큰 기대를 받고 있다. “최 회장도 창원씨를 총애하고 있고 윤원, 신원씨 등 두 형들도 자신의 꿈을 대신 이루려는 듯 동생을 크게 아낀다. 그는 `웃분들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며 술과 담배를 멀리하는 등 나이에 비해 다부진 면이 있다.” 선경그룹 관계자의 귀띔이다. 창원 씨는 94년 선경 경영기획실 과장으로 입사한 뒤 95년에 선경인더스트리로 옮긴 뒤 현재 전략기획실장(이사)을 맡고 있다.
경영수업 과정, 본인의 집념과 경영능력, 최 회장 아들로서의 프리미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대권 레이스는 태원씨가 선두를 지키고 재원, 창원씨가 뒤를 쫓는 3룡(龍)의 각축전 양상이라는 것이 그룹 안의 지배적 시각이다.
이와 함꼐 최 회장이 자신의 말을 실천에 옮기더라도 당장 경영에서 완전 히 손을 떼기는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그룹 경영기획실의 한 고위 관계자는 “단전호흡을 하며 꾸준히 건강관리를 해 온 최 회장은 요즘도 양주 반병을 비울 정도로 건강이 좋다. 경영환경도 좋지 않고 2세들도 아 직 어린데 최 회장이 조기은퇴하는 것은 그룹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이에 따라 그룹 내부에서는 완전한 2세체제로 넘어가기 전 ‘최종현 명예 회장-전문경영인 회장-2세들 부회장’이라는 과도체제를 몇년간 거칠 것 이라는 전망이 최근 들어 부쩍 늘고 있다. 이 방안은 최 회장이 경영일선 에서 물러나겠다는 약속을 지키면서도 2세체제로 가기 전까지 후계자의 뒤를 챙겨줄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또 2세들에 그룹을 떼어 맡겨 경영능 력을 최종 테스트할 수도 있다.
현 그룹 체제, 쪼개지느냐 유지되느냐
이 경우 분할경영 판도는 2세들의 현 역할과 위상 등을 감안할 때 윤원씨 는 (주)선경이나 워커힐, 태원씨는 유공과 SK텔레콤, 재원씨는 SKC, 창원 씨는 선경인더스트리를 각각 맡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과도체제가 계속 이어질 수는 없다. 그룹이 50주년을 맞는 2003 년을 전후해 어차피 실질적인 3대 회장이 결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 경이 쪼개질지 아니면 현 그룹체제를 그대로 유지해 나갈지는 최 회장의 판단과 당시의 상황에 의해 결정될 문제이다. 이와 관련해 최 회장이 평 소 “LG그룹을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해 온 것은 음미해 볼 대목이다. L G그룹은 구씨와 허씨 가문이 50년간이나 ‘`한지붕 두가족’의 관계를 유 지하면서도 불협화음없이 3세체제까지 성공적으로 이어오고 있다. 이를 보면 최 회장은 가능한 현 그룹체제가 계속 유지되는 것을 원하고 있는 것같다. 현실적으로 (주)선경이나 선경인더스트리가 떨어져 나가더라도 그룹과 연계가 없는 한 독자적으로 살아남기는 힘들다는 지적도 많다. 조 카들은 최 회장을 부모님처럼 존경하며 따른다고 한다. 최 회장 때문인지 사촌형제간에 마찰이 있다는 얘기도 없다. 그룹 관계자는 “최 회장은 한 달에 한번씩 가족들을 모두 모아 식사를 같이 하며 우의를 다진다”고 말 한다. 그러나 이런 평화가 최 회장 사후에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단언하 기는 힘들다.
곽정수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