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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1997년06월12일 제 16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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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사에 집권당 최초의 경선으로 기록된 92년 5월19일 민자당 전당 대회를 현시점에서 떠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현재 신한국당에서 보이는 분열조짐은 5년전 전당대회의 귀결을 고스란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당시 갈등은 3월28일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표최고의원이 대통령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를 5월9일 이전에 열기로 전격합의하면서 시작됐다. 3월31일 민자당 내 김윤환 김용태 의원 등 9명의 민정계 중진들을 중심으 로 “김영삼 후보 추대위”를 결성하면서 YS 진영이 발빠르게 움직이자 박태준 이종찬 이한동 의원 등을 중심으로 한 민정계 반YS진영이 “5월9 일 이전 전당대회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며 6월 초 개최를 요구하고 나섰다. 결국 시기를 둘러싼 갈등은 5월19일로 절충됐다.
그러나 후보선정을 두고 혼란을 겪던 반YS진영이 4월2일 박태준 이종찬 이한동 박철언 의원 등 ‘민정계 중진 6인 모임’을 열고 4월15일까지 후 보를 단일화하기로 합의하자 하루 만에 갈등은 다시 확대됐다. 단일화 움 직임에 불안을 느낀 YS와 민주계가 “노 대통령이 김 대표에 대한 지지의 사를 표명한 가운데 경선을 치르는 것이 3당 합당 정신에 따르는 것”이 라며 사실상 ‘지명형식의 제한 경선’을 요구하며 반발한 것이다. 물론 반YS 진영은 “완전경선 관철”을 요구하며 팽팽히 맞섰다. 그러자 YS는 4월4일 “결과에 대해 승리만 있을 뿐이지 패배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며 경선에서 질 경우 탈당할 수 있다는 위협을 시작했고 민주계는 집단탈 당을 위한 서명작업에 돌입했다. 이 갈등은 결국 노 대통령과 YS의 단독 회동 뒤 봉합됐다.
그리고 4월25일 반YS진영의 단일후보로 확정된 이종찬 의원과 김영삼 대 표가 후보로 등록함으로써 본격적인 경선국면에 들어갔다. 그러나 28일 민정·민주·공화계 의원 등 지구당 위원장 70%가 참여한 가운데 ‘김영 삼 민자당 대통령 후보 추대위원회’가 발족되자 이 의원쪽의 반발은 본 격화됐다. 추대위 결성 과정에서 청와대 비서진들이 지구당 위원장과 대 의원들에게 YS 지지를 설득하고 안기부까지 나서 대의원들에게 압력을 행 사했다며 “모양새 갖추기 들러리 땐 경선을 거부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 결국 5월6일 노 대통령은 외압의 실체로 지목된 손주환 정무수석을 전 격 교체하면서 이 후보의 경선 이탈을 서둘러 막았다.
하지만 양 진영은 서로의 탈법 사례를 폭로하는 비난전을 계속하며 갈등 을 증폭시켰고 5월12일 이 후보쪽은 또다시 ‘노 대통령의 YS 편향’을 문제삼기 시작했다. 김영삼 추대위 해체, 관련자 추가문책, 합동정견발표 등 3개항의 요구조건이 관철되지 않으면 경선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 것 이다. 14일부터 청와대가 나서 3개항에 대한 양쪽의 절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경선을 하루 앞둔 18일 이종찬 의원은 지지자 5백여명 과 함께 “전당대회 무효”를 선언하고 경선을 거부했다. 결국 이종찬 후 보와 그 지지자들이 불참한 가운데 반쪽으로 치러진 19일 전당대회에서 6 6%를 득표한 김영삼 후보가 당선됐다. 이 사실을 지금 예비후보들은 너무 나 잘 알고 있다.
신승근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