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1997년06월12일 제 161호

청와대의 파산!

(사진/5월29일 있었던 신한국당 대선주자와의 오찬 회동. 한 대선주자는 "아들까지 사법처리한 마당에 각하께서 주저하실 일이 무엇이 있습니까" 라면서 김 대통령을 몰아세웠다.)

　“청와대는 무너지고 대통령은 없어졌다.” 요즈음 정국 상황을 표현하 는 말이다. 거듭되는 국정 혼선과 판단력 부재, 무능, 국정장악력 마비, 권위 상실 등등. 이런 것들로 인해 국정운영의 최고책임자이자 권력의 핵 심기관인 대통령의 기능이 사실상 정지됐다는 것이다.

화해를 한 뒤 뒤통수 치다

최근 공직자 사정과 대선자금 해법을 둘러싸고 나타났던 문제들은 최고 권부인 청와대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 우선 통치권 행사의 기본 구상이나 프로그램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5월19일 국민회의 전당대회를 계기로 김 대통령은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에게 강인섭 정무수석을 보내는가 하면 전화를 직접 걸어 축하인사를 건 네는 등 화해 제스처를 취했다. 남아 있는 최대 과제인 대선자금 문제에 대한 야당의 양해를 구해 오랜 한보 정국에서 벗어나려는 지극히 `‘정상 적인’ 정치행위로 여겨졌다.

그러나 화해를 요청한 지 하루 만인 5월21일 청와대는 느닷없이 공직자 7 0여명에 대한 사정작업 착수를 발표했다. 야당의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주 요한 내사 대상이라는 사실도 숨기지 않았다. “축하인사 속에 비수가 숨 겨져 있었다”는 야당의 반발은 당연했다.

바짝 독이 오른 야권에 대해 김 대통령은 23일 이번에는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를 통해 92년 대선자금과 관련해 “자료가 없어 공개할 수 없다”며 대리 발표를 감행했다. 야권은 결국 폭발했다. 타고난 승부사, 정치 게임 의 달인이라는 평을 받는 김 대통령의 솜씨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 로 뒤죽박죽이다.

이후 청와대는 `‘오락가락 수준’을 넘어서 바람부는 대로 춤추기 시작 했다. 대선자금 공개 불가 방침은 공개 검토쪽으로 선회했다. 29일 대선 주자 오찬 회동에서는 유보쪽으로 돌아섰고 30일의 대국민 담화에선 공개 불가를 선언하는 등 사흘 동안 세번씩이나 입장이 바뀌었다.

30일의 대국민 담화문은 김 대통령의 판단력 상실을 잘 드러냈다. 대다수 국민들은 92년 대선자금에 대한 솔직한 고백과 이를 바탕으로한 사과, 그 리고 새로운 방향 제시가 있으리라 기대했다. 설령 ‘고백’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사과’만큼은 진솔하리라고 예상했다는 게 정치권의 판단이었 다.

그러나 김 대통령의 모든 상식과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 자체로 깜짝쇼였 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담화문에는 고백이나 사과는커녕 협박만 있다 ”며 “정국이 더욱 꼬이지 않을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국민회의의 김근태 부총재는 그날 김 대통령의 ‘중대결심 운운’에 대해 “문맥을 앞뒤로 따져볼 때 아무리 생각해도 중대결심이라는 단어가 들어갈 자리가 아닌 것 같다”고 평했다. 야권만이 아니다. 여권 내에서도 “도대체 판 단력이 있기나 한 것이냐”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판단력에 대한 의문은 국정운영의 통합조정 및 수행능력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우선 각 수석비서관실에서 올라오는 의견이나 정책들에 대한 우선 순위 조정이나 교통 정리가 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 고 의사결정권자의 조정이 있었다면 정무수석실과 민정수석실이 공직자 사정 문제를 놓고 `정치를 너무 모른다’느니 ‘`사정에는 여야 구별이 없다’느니 하면서 꼴사납게 싸우는 일은 없었을 것이며, 국정의 혼선도 이렇게 심화되지는 않았을 것 아니냐는 분석이다.

통치권자 면전에서 다투는 대선주자들

이러한 문제가 누적된 결과이겠지만, 대통령의 권위마저 땅에 떨어졌다. 김 대통령의 담화문에서 중대결심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무튼 그 소리를 듣고도 무서워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 대신 비아 냥이 많았다는 사실은 그의 권위가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5월29일 있었던 신한국당 대선주자와의 오찬 회동은 최고권력자의 입장에 서 볼 때 더욱 참담하다. 당 총재이자 최고 통치권자의 면전에서 대선주 자들이 다투는 것 자체도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인데, 하물며 한 대선주자는 “아들까지 사법처리한 마당에 각하께서 주저하실 일이 무엇 이 있습니까” 하면서 김 대통령을 몰아세웠다.

뿐만 아니다. 청와대 참모들조차 ‘주군’에게 책임을 미루는 일이 비일 비재하다. 이회창 대표의 대선자금 공개 불가 방침 천명 이후 김 대통령 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던 때 청와대의 한 고위관계자는 기 자간담회 자리에서 “대통령께서 입장표명이 불가하다는데 우리보고 어쩌 란 말이냐”며 “우리도 차라리 언론에서 하라는 대로 따라 주었으면 좋 겠다”고 말했다. 물론 상황이 답답해서 혹은 대통령의 그릇된 상황 판단 이 안타까워서 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대통령의 참모로서 할말이 아니었 다.

여권의 고위직을 지낸 신한국당의 한 의원은 “최근 청와대가 하는 일들 은 ‘한심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지금의 상황은 집권 말기에 나타나는 통상적인 ‘레임 덕’ 즉, 권력누수 현상이 아니라 통치권의 기능 정지 내지는 권력 붕괴 현상에 다름 아니라 는 것이다.

그는 또 “권력누수는 대통령이 나름대로 기능을 하고 있지만, 주변 사람 들이 후임자에게 빌붙어 생기는 것인데 비해 지금은 그런 것이 아니라 대 통령의 권위나 기능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의 시사프로그램 `<시사자키> 진행을 맡고 있는 정범구 박 사도 “지금은 단순한 권력누수가 아니라 대통령이 권력을 사용하지 못하 는 상황으로 정권의 뇌사상태라는 표현이 적확하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재야운동권에서는 대통령 퇴진 운동에 돌입했으며, 야당도 간 접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하야론을 거론하고 있다.

하야찬성 30%, 아직은 참고 있지만…

하야론의 논리적인 근거는 “대통령이 최고결정권자로서 더이상 업무수행 능력을 상실한 만큼 새로 교체하는 게 국가 이익을 위해 더 낫다. 하야할 경우 현행 헌법상 새 대통령 선출을 앞당기는 것뿐이기 때문에 중도하차 한다고 해서 헌정 중단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권은 아직 하야론에 반대하는 쪽이 강하다. 야권도 김 대통령 의 신한국당 탈당을 위한 지렛대로 하야론을 활용하는 성격이 강할 뿐 진 짜 하야 상황을 상정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이는 하야가 이뤄질 경우 예상치 못하는 정국 불안이 우려되거니와 장래 어떤 정권도 임기 내 안정 성을 유지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결국 선택의 주체는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 아직 우리 국민들은 하야에 대해 30% 정도만이 동의하고 있다. 주인들이 권력 에 대해 ‘참고 있다’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그러나 각종 여론조사 결 과는 국민의 인내가 서서히 한계수준에 도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야 의견이 작은 폭이지만 꾸준히 늘고있는 것이다.

김종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