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1997년06월05일 제 160호 한겨레21

야권 YS와 정면대결 채비

(사진/국민회의 간부회의. 대선자금 공개를 거부하면서 정치권 사정을 밀어붙일 경우 김 대통령에 대해 하야론으로 맞받아치겠다는 강경자세를 분명히 했다.)

“김영삼 정권은 항상 호의를 보인 뒤 뒤통수를 친다. 꽃다발 뒤에는 비 수가 숨겨져 있었다.”

청와대가 5월23일 대선자금 공개 거부와 함께 야권 단체장에 대한 사정에 착수하자 국민회의 이종찬 부총재가 한 말이다. 김영삼 대통령이 20일 김 대중 국민회의 총재에게 대선후보선출을 축하하는 전화와 화환을 보내는 등 화해제스처를 보인 뒤 바로 야권의 목을 죄어오는 데 대한 분노의 표 현이다.


“대통령은 이미 자격을 잃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야권 단체장에 대한 사정을 통해 대선자금문제를 넘 어가려는 김 대통령의 의도에 대해 배신감과 함께 격분을 토해내고 있다. 김 대통령에 대한 하야론은 물론 공동 규탄대회 집회 개최 등을 검토하는 등 발끈하고 있다. YS(김영삼)와 정면대결도 불사한다는 전의가 야권에 가득한 것이다.

야권의 두 김씨도 김 대통령의 행태에 대해 매우 격앙돼 있다고 측근들은 전하고 있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는 청와대의 대선자금 공개 거부와 야 권 단체장 사정 방침을 보고하자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아예 말문을 닫았 다고 측근은 전했다. 김종필 자민련 총재 역시 “안 할 짓만 골라서 한다 ”며 버럭 화를 내는 등 김 대통령의 행태에 대해 더욱 노골적인 불만을 나타냈다.

야권의 논리적 반응은 임기말의 김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해서는 안 되는 일만 골라서 한다’는 말로 요약된다. 야당이 말하는 김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다름아닌 대선자금 공개이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야권 단체장을 겨냥한 정치권 사정을 말한다.

야당의원들 사이에서 “YS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거나 “청와대가 나 사 풀린 것 아니냐”는 발언들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한결같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들이다. 대통령 하야론 제기도 자연스럽게 기정사실화돼 가는 분위기다. 국민회의는 “대통령은 이미 자격을 상실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국민회의 한 의원은 “그동안 당내에서 금기시돼던 YS 하야론을 YS 스스로가 해금시켜준 꼴이 됐다”고 강조했다.

야당이 당장 하야론을 전면에서 제기할 지는 미지수다. 김 대통령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일 탈당 등 ‘반성적 조처’를 아직은 기대하기 때문 이다. 다만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공동 규탄집회 개최 등 단계적 투쟁전략 을 마련해 YS에 대한 전면적인 압박을 추진할 계획이다. 하야론은 이미 재야쪽에서 제기할 태세인 만큼 김 대통령의 대응 및 여론의 추이 등을 보아가며 제기한다는 것이다.


야권 단체장 사정은 부정 선거위한 전초작업

야당은 그동안 정국전환의 전제조건으로 최소한 김 대통령의 대선자금 공 개와 대국민 사과를 요구해왔다.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는 지난 20일 대선 후보선출 축하인사를 위해 일산자택을 찾아온 강인섭 청와대 정무수석에 게도 대선자금 공개와 대국민 사과, 김 대통령의 신한국당 탈당과 거국중 립내각구성, 정치제도 개선 등 3가지 요구사항을 김 대통령에게 전해달라 고 당부했다. 그러나 DJ(김대중)의 제안은 청와대로부터 `‘대선자금을 밝히고 싶어도 자료가 없어 밝힐 수 없다’는 메아리가 돼 돌아왔을 뿐이 다. 김종필 자민련 총재도 기회 있을 때마다 청와대가 스스로 대선자금를 공개하고 내각제로 선회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그러나 YS는 대선자금 공개는커녕 야권 단체장 사정이라는 비수를 야당을 향해 들이댔다. 사실 DJ와 JP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하게 됐다. 대 선자금 고백은 자료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기분 이 나쁘다. 핑계치고는 유치원 수준이어서 아예 야권을 무시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는 것이다. 야권도 일부 자료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여권엔 이 자료가 몇몇 사람의 손에 남아있는 것으로 야권은 보고 있다. 특히 김 대통령이 의지만 있다면 당시 선거관계자들을 불러 충분히 전체적인 윤곽을 보여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반문도 빠뜨리지 않는다. 야권이 보기에 여론은 청와대와 신한국당에 등돌리고 있다. 당장 하야론 을 제기하더라도 크게 무리를 빚을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보사건과 차남 김현철씨의 비리구속으로 이미 자기자신이 사정대상의 몸체라는 지 적을 받고있는 YS가 `‘표적사정’에 나서는 ‘진짜로 소가 웃을 일’에 누가 공감하겠느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야당의 한 의원은 옛날에 자식 이 좀도둑을 하다 손가락질을 당하면 창피해서 가족들이 모두 밤에 짐을 싸서 동네를 떠났던 사례를 들었다. 그만큼 `‘아들의 허물도 아비의 허 물’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 국민정서라는 것이다.

야당은 또한 야권 단체장에 대한 사정 배경에는 오는 12월 대선에서 또다 시 부정선거를 치르려는 여권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경계하고 있다. 사정의 칼날을 세워 야권 단체장들의 손발을 묶어놓고 여당의 부정선거는 눈감아주려는 공안선거를 획책하려는 의도라는 것이다. 야당은 지난해 4 월 총선은 검찰과 경찰을 앞세운 여권의 공안 공세에 야권 후보자들이 잔 뜩 위축돼 야권이 패배했던 것으로 야권은 평가하고 있다. 실제로 일선 자치단체에서는 이미 야당 단체장들이 움츠러들고 있다. 국민회의 소속인 서울의 한 민선구청장은 “검찰이 그동안 야당 단체장에 대해서는 계속 주시해와 운신의 폭이 좁았다”며 “선거 때가 되면 사정기관들이 으레 야당 단체장을 희생양으로 삼아왔기 때문에 대부분 몸을 사리고 있다”고 말했다.


“호미 아닌 가래로도 사택 막지 못할 것”

한편 야권은 김현철씨 구속 이후 청와대가 난국타개를 위해 화해의 몸짓 을 보일 것으로 기대했다. 자민련의 한 관계자는 “사실 김현철 구속 이 후 힘빠진 YS를 더이상 공격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판단에 따라 내부적으로 더이상 YS에 대해 공격하지 말자는 합의가 있었다”며 “그러 나 YS가 다시 싸움을 걸어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완전히 승부를 내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국민회의도 대선자금 공개가 이뤄지지 않는다 면 YS의 퇴진이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박지원 기획조정 실장은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사태가 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야권 단체장에 대한 대대적인 사정을 통해 대선자금문제를 피해가려던 YS 와 대선자금을 공개하지 않을 경우에는 최후의 카드인 하야론를 꺼낼 수 밖에 없다는 DJ와 JP가 막다른 골목 대결로 치닫는 형국이다.

김성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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