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1997년06월05일 제 160호 한겨레21

독일의 참회, 일본의 망각

프랑크푸르트=이부영 민주당 국회의원

지난 5월 초 ‘섬멸전쟁’이란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 위치한 바울교회. 전시물을 둘러보던 한 30대 주부가 전시물이 증언하는 역사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눈에 들어온 사진들은 1941년부터 1944년에 이르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중 나치가 저질렀던 처참한 죄악상이었기 때문이다.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시내 중심가에 높이 걸려 있는 주검에서 부터 옛 소련·폴란드·세르비아·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그리스 등 나 치가 점령한 모든 땅에서 펼쳐져 있는 죽은 자의 행렬들.

이 30대 주부는 유대인을 포함한 피점령지 민간인들의 씨를 말리려는 듯 자행됐던 이 만행이 ‘자신의 아버지들’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이 못내 믿기 어려운 듯 끝내는 눈을 감고 말았다.


부끄러운 ‘만행’ 증언하는 잔혹한 사진

(사진/독일군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대인에 대한 참혹한 처형을 집행하고 있다. 사진은 `섬멸전쟁'전을 마련한 주최측에서 펴낸 사진집에 실린 것이다. )

독일 함부르크 사회과학연구소가 주최하고 프랑크푸르트 시당국이 주관해 지난 4월14일부터 5월20일까지 열린 이 전시회를 보고 놀란 것은 이 30대 주부만이 아니다. 이날 전시회장을 찾은 5백여 관람객들도 대부분 ‘나치 의 섬멸 전쟁’에서 충격을 받은 듯했다.

일흔 남짓 돼보이는 노신사는 자신과 같은 세대들이 저질렀던 반인류적 범죄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듯 한자리에 얼어붙은 채 꼼짝않고 서서 전시 물을 둘러보았다. 또 가끔 눈에 띄는 모히칸 헤어스타일(머리 양쪽을 모 두 깎고 한복판만 닭벼슬처럼 우뚝하게 기른 머리 모양. 주로 신나치주의 청년들이 애용한다)의 청소년들마저도 숙연하고 진지한 자세를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1848년에 독일 의회가 처음으로 소집된 역사성을 가지고 있는 이 바울교 회가 증언하는 ‘나치의 참상’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섬멸작전’에 는 많은 사진자료와 함께 히틀러의 최고 사령부가 나치 독일군의 일선 단 위부대장들에게 하달한 민간인 학살 명령서, 당시의 학살 행위에 참가했 던 나치 독일군 출신 노인들과 죽음의 문턱에서 용케 살아남은 생존자들 의 증언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 등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모 든 만행이 최고권력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뤄졌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기침소리 하나 내지 않는 진지함으로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들’의 죄 악상을 둘러보는 관람객들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이들은 아마 도 전시된 사진자료들을 통해 ‘되풀이돼서는 안 될’ 과거 역사와 대화 를 나누는 것인지 모른다. 다른 관람객들의 관람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이어폰을 끼고 비디오 테이프를 시청하고 있는 신세대들의 모습엔 ‘역사 의 진실’이 가져다준 충격 탓인지 엄숙함마저 보였다.


과거 용서받아야 공동체 형성 가능하다

전시장에서 만난 프랑크푸르트시 문화담당관 안드레이 보데크는 자신이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극)의 희생자 후손이라고 소개했다. 보데크는 나 치 독일의 전쟁범죄에 대한 역사 청산 작업이 통일독일에서도 꾸준히 진 행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물론 나치 독일군 모두를 전범으로 모는 것은 부당하다면서 전시회 참관을 반대하는 보수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 만, 나치 독일이 저질렀던 범죄가 또다시 재현되어서는 안 된다는 독일 국민 일반의 합의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강조했다.

보데크는 그 말끝에 독일과 유사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일본인들이 2차대 전 동안에 자신들이 저지른 참혹한 전쟁범죄 행위를 될 수 있으면 외면하 려는 태도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독일이 새로운 독일로 거듭나 이웃 국가들에게 유럽 공동체의 신뢰받는 일원으로 받아들 여진 것도, 또한 독일 통일이 가능했던 것도 나치 독일의 반인류적 전쟁 범죄에 대해 독일이 철저하게 반성하고 청산하려는 자세를 보였기 때문이 었다는 것이다. 보데크는 이러한 경험에 비춰볼 때 일본이 태평양 전쟁의 범죄를 부정하는 한 인접 국가들에게 믿을 만한 이웃으로, 아시아 국가의 일원으로 절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불행하게도 현재의 일본 상황을 보면 보데크의 불길한 예언이 그대로 적 중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느낌이다. 평화헌법 시행 50주년이 되는 올해 를 맞으면서 일본내에서는 ‘평화’헌법이 2차대전 전승국이 강요한 굴욕 적인 ‘반일’(反日) 헌법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또 교 육문제에서도 ‘전승국이 강요한 반일 교육’을 끝장내야 한다며 태평양 전쟁 당시 벌어진 학살행위와 종군위안부 문제를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 다는 움직임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더욱이 보수파 정치인들은 걸핏하면 태평양 전쟁이 정당했다는 망언을 일삼고 있으며, 유권자들은 그런 의원 들을 다음 선거에서 어김없이 당선시켜 준다. 이처럼 전쟁 범죄 행위를 합리화하거나 애써 회피하고 망각하려는 분위기는 비단 극우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본 국민 전반에 생각보다는 넓게 퍼져 있는 것이다.

두 나라의 이런 상반된 자세는 양국을 대하는 주변 국가들의 상반된 태도 를 낳게 하는 원인이다. 과연 일본이 독일처럼 과거의 범죄행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웃의 국가들이 어 떻게 일본을 신뢰받는 아시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필자는 전시장을 나서며 나치 독일군의 학살전쟁 기록전시회를 일본에서 도 개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보데크에게 제안했다. 그는 좋은 제안이 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독일 당국이 직 접 일본 전시회 개최를 추진하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다만 과거를 잊지 않으려는 일본 내의 뜻있는 민간단체에서 초청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일본이 불신·증오 씻기 위해서는…

왜 일본인들은 옛 일본군의 반인류적 범죄를 증거하는 사진 자료 전시회 를 도쿄 시내에서 스스로 개최해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일까?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추악한 과거를 잊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 로부터 핍박당한 아시아 국가들은 그 참상을 절대로 잊지 못한다. 일본이 과오를 합리화하고 외면하면 할수록 이웃 국가 국민들의 일본에 대한 불 신과 증오의 감정은 더욱 증폭되는 것이다.

정녕 역사는 망각의 시간도 아니며, 강자만을 위한 공간도 아니라는 것을 일본인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프랑크푸르트=이부영/ 민주당 국회의원

이 글은 이부영 의원이 지난 5월초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섬멸전 쟁전’을 보고 기고한 것이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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