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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06월05일 제 160호 한겨레21

미국 구걸행위 합헌 판결

(사진/"걸인들의 구걸은 표현의 자유이다." 부랑아들이 당당한 직업인으로 인정받았지만 앞날은 순탄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5월 중순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시 하버드광장. 광장 곳곳에 서 구걸하던 걸인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이제는 경찰이 우리를 귀찮게 할 수 없게 되었다.”“생존권을 보장받 게 되었다!” “정당한 직업의 자유를 인정받게 되었다.”

걸인들의 이런 열띤 모습은 매사추세츠주 최고법원의 한 판결에서 비롯됐 다. 매사추세츠주 최고법원이 이날 구걸행위를 ‘합헌’으로 판결한 것이 다. 법원은 판결에서 “구걸행위는 미 수정헌법 제1조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는 행위”라고 밝혔다. 이 판결은 미국 시민자유연맹 매사추세츠 지부가 주 정부를 상대로 벌인 3년간의 소송에서 따낸 열매이다. 법관 7 명이 전원일치로 판결한 이 결정에 따라 경찰이 지난 1백66년 동안 걸인 들을 잡아가두는 데 동원된 ‘부랑자 단속법’은 위헌 처분을 받았다. ‘ 부랑자 단속법’이 “이웃에게 도움과 동정을 호소할 수 있는 희망이라는 포괄적 권리도 박탈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경찰의 부랑자 단속은 권리 박탈 행위

대학가인 하버드광장 주변에서 관광객들의 호기심어린 눈초리에 걸인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이들의 모습도 제각각이다. 깡통을 놓고 빵집 앞에 넋놓고 앉아 있는 인디언 출신 아주머니, 지하철 역사 구석에서 쓰레기더미 같은 ‘베개’를 베고 드러누운 백인 할아버지 , 신호등 언저리에서 멈춰서는 차를 기다려 “도와달라”는 팻말을 흔드 는 중년 아저씨, 지하 환기통에서 나오는 더운 바람을 쐬면서 종이상자를 몸에 두르고 잠을 청하는 젊은 흑인, 편의점 앞에서 “한푼 줍쇼”하면서 종이컵을 내미는 루마니아계 할머니…. 하지만 최고법원의 ‘구걸 합헌 판결’ 이후 이들의 모습은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이제 구걸도 당당히 ‘직업’이 됐으니 말이다.

그러나 걸인들의 이런 기쁨과는 달리 시민들은 불안에 가득 찬 모습이다. 관광수입이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우려 탓이다. 보스턴 시내 관광명소인 뉴베리거리의 한 카페주인은 “냄새를 풍기면서 거리에 침이나 뱉고 쓰레 기통이나 뒤지면서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 늘어날 판”이라며 이번 판결 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안 그래도 모르는 척 지나치려면 가까이 다가와 귀에 대고 ‘어이 부자 친구, 잔돈 좀 있어?’라고 소리칩니다. 그 정도로 그치면 다행이죠. 어 떤 이는 자꾸만 따라와요. 앞으로 경찰들이 이들을 단속하지 못하게 되었 다니 도대체 어쩔 셈입니까?”

시 당국이나 경찰도 난처하기는 마찬가지다. 우선 부랑자수와 범죄현상 사이에 상관관계가 높다는 통계를 갖고 있는 당국은 예전과 다른 방법으 로 걸인문제에 접근할 수밖에 없게 됐다. 시 당국은 “경험적으로 볼 때 부랑자들은 술이나 마약에 찌든 적이 많기 때문에 통제하기가 쉽지 않다 ”면서 “이들의 숫자를 줄이는 것이 지역사회를 안정시키는 첫걸음”이 라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판결로 ‘지역사회 안정방안’은 바뀌 어야 한다. 톰 메니노 보스턴 시장은 이에 따라 기존의 부랑자 보호소 확 충 작업과 함께, 미숙련 노동자들을 위해 주말 야간노동 등 기피직업에 고용하는 기구를 만들어 부랑아를 흡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그 는 연방정부에서 3천3백50만달러의 원조를 받아 부랑자들의 ‘내집 마련 ’을 도울 계획도 제시했다.


시민들, 관광수입 감소 걱정에 휩싸여

이번 판결로 바빠진 대상에 경찰을 빼놓을 수 없다. 경찰은 유객행위금지 조례를 강화하는 한편 현행 판결의 해석에도 꽤 신경을 쓰는 모습이다. 현행 판결에 구걸행위가 ‘평화적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언제든지 경찰 권을 발동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즉 치안방해, 경관 공격, 명령불 복종, 무단침입 행위가 벌어지면 바로 체포할 수 있다. 경찰은 현재 자체 변호사들을 동원해 이 ‘평화적 한계’의 범위와 적용에 관한 포괄적 해 석을 끌어내려 애쓰고 있다.

따라서 일부 걸인들이 이 ‘평화적 한계’가 이번 판결을 무용지물로 만 들 수 있다고 불만을 표시하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케임브리지 시 중앙광장에서 만난 거지는 이번 판결에 대해 “아무도 만족 못 시킨 판결이다. 무엇보다 ‘공공장소에서 평화적으로 할 경우’라는 단서조항 이 문제”라면서 “도대체 어디까지가 공공장소인가? 현금자동출납기 5m 이내로 접근하면 잡아간다는 말인가. 평화적으로 한다는 것은 또 뭔가? 용모나 복장이 ‘공격적’이라는 이유로 잡아갈 수 있다는 말 아닌가. 따 라서 이번 판결로 경찰이 대놓고 윽박지르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 빼놓고 는 나아진 것이 있을지 의문이다.”

하버드광장 하버드대학 편의조합 앞에서 만난 걸인 릭 아퀴잡(49)도 “우 리는 마약을 거래하지도 않고, 동네 편의점을 털러 어슬렁거리지도 않는 다. 정직하게 자선행위를 요구하고 있는 것뿐이다”라면서 귀에 낀 보청 기를 가리켰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구걸행위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논란에도, 이번 판결이 갖는 중요성은 결코 적지 않다. 우선 눈여겨 봐야 할 점은 이번 판결에서 거지라는 특정 인간집단을 대하는 미국사회 의 변화된 시각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판결은 부랑인에게 온전 한 한 시민으로서의 목소리를 회복시켜 주었다. 미국 헌법이 “우리 (미 국)국민은…”으로 시작하고 있기는 하지만, 애초 이 ‘국민’은 일정 정 도의 재산을 형성하여 납세의 의무를 다하는 백인들을 가리키는 낱말에 불과했다. 흑인 노예가 미국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피어린 내전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이제 비로소 부랑인·거지가 이 대열에 합류할 계기가 마련 된 것이다.


‘국민의 이웃’ 되기까지는 아직 멀다

이런 시각의 변화가 한푼의 돈보다도 걸인들에게 중요하다는 지적은 그래 서 설득력있어 보인다. 사실 걸인들은 가난 자체보다도 이웃으로부터 ‘ 존재가 없는 사람’ 취급당하는 것을 더 서러워해 왔다는 것이다. 지난 7 0년대 뉴욕에서 무숙자 생활을 하다 뒷날 대학총장이 된 한 인사는 당시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자의식과 ‘나도 사람이다’라는 영혼의 외침 사이에서 깊은 소외감을 느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제 정말 부랑인에게도 1백50년 만에 ‘국민과 이웃’의 자격이 주어진 것일까? 이를 위해서는 시민들의 부정적 인식, 경찰의 대응 여부, 시 당 국의 좀더 효율적인 부랑자 정책 등 넘어야할 산이 많은 게 사실이다. 하 지만 이민자들의 의식의 뿌리가 살아있고 노예해방론자들의 근거지였던 보스턴에서 부랑자들을 끌어안으려는 새로운 움직임을 보인 것만은 사실 이다. 과연 이런 움직임이 미국 내 다른 지역으로 파급될지 주목된다.

보스턴=윤성주 통신원


인터뷰/ 걸인 존 존슨

매사추세츠대법원 판결이 있던 다음날. 하버드광장 한 편의점 앞에서 만 난 존 존슨(31)은 종이컵을 들고 편의점에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연신 “ 한푼 줍쇼”를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구걸행위는 마치 동네 유지가 기금 마련을 하는 것처럼 당당했다. 지나치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를 아는 사람이 많은지 존에게 “굿 애프터눈”을 건넨다.

-이번 판결을 알고 있나.

=물론이다. 우리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결정이다. 경찰도 이제는 우리를 귀찮게 못하게 되었다. 표현의 자유란 참 좋은 것이다. 수정헌법 1조를 만든 “제퍼슨 만세”라고 외치고 싶다.

-왜 이런 일을 하게 되었나.

=나라고 이 짓이 좋아서 하겠는가. 전에는 건물 경비로 여러 해 일했다. 그 이전 직장은 밝힐 수 없다. 한데 마땅히 배운 것도 없고…. 복지혜택 도 깎이고….

-이곳에 동료들은 많은가.

=동료라기보다 경쟁자들이다. 10명에서 15명쯤 되는 것으로 안다. 어떤 이는 손뼉을 치기도 하고…. 이 짓을 즐기는 이들도 있다.

-겨울에는 어떻게 하나.

=이것도 직업이다. 전천후 24시간 직장이다. 직업이라면 최소한의 장비는 갖춰야 하지 않겠는가? 두꺼운 외투에 방한화 정도는 장만하고 있다.

-하루에 얼마나 버나.

=대중 없다. 커피값이나 택시값 정도가 고작일 때도 있고 저녁값이 빠질 때도 있다. 이것으로 중고차를 산 이도 있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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