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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
1997년06월05일 제 1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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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오순자의 작품에는 사물 자체의 아름다움이 살아 숨순다.
흑과 백으로 이어진 벽에서 순결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이주헌/ 미술평론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그림은 종이나 캔버스 같은 평면 위에 그린다. 물감으로. 그러면 우리가 그림을 볼 때 우리는 물질로서의 천이나 종이, 물감을 보는 것일까? 아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빚어낸 하나의 미적 세계를 본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여인이나 풍경, 또 는 그럴싸한 추상의 이미지를 본다.
우리는 그림을 대할 때 하나의 상상적 세계를 본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의 현실이 아니다. 재현이거나 허구의 세계다. 우리는 그림 속의 여인에 게 말을 걸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대상을 ‘그녀’라고 느끼고, ‘그녀가 아름답다’거나 ‘그녀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따 지고 보면 ‘그녀’는 물감 덩어리일 뿐이다. 우리와 다르다. 그래도 그 림 속의 그녀는 우리와 같다. 우리는 그렇게 믿고, 그런 관념 위에서 그 림을 감상한다. 그리고 감동을 받는다.
조형의 물질적 특성 반영한 작품
6월6일까지 국제화랑에서 개인전을 갖고 있는 재미화가 오순자는 이를테 면 “그게 왜 그녀인가, 그것은 단지 물감과 천일 뿐이다”라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작가이다. 오순자의 작품을 보자. 그녀는 여러 개의 패널을 조합해 한 작품을 만든다. 그 패널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추상적인 얼룩 무늬 패턴이 보인다. 일부 패널의 경우 검은 안료로 다 칠한 경우도 있다 . 추상화같다. 그런데 일반적인 추상화와는 다르다. 일반적인 그림과는 다르다. 보통 그림은 하나의 평면 위에 안료를 사용해 그리는 것인데, 그 의 작품은 얼룩이나 칠이 한 평면 위에만 존재하지 않고 모서리를 지나 꺾인 면들로까지 이어진다. 그 꺾인 알루미늄면을 고정하기 위해서 그 면 들에 못을 박은 자국도 선명하다. 그러니까 그의 작품은 평면이 아니라 입체다. 꺾인 면들에까지 ‘그림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이 여 러 개 모여 하나가 돼 있다.
보통 우리가 그림을 대할 때 그것은 하나의 창이 된다. 다른 세계를 보여 주는 창이다. 그런데 그 창이 하나의 평면으로 이뤄지지 않고 현실의 공 간을 따라 입체적으로 꺾어진다면 그 창은, 그 허구는, 순식간에 이 세상 에서 사라진다. 남는 것은 창이라고 믿었던 물질뿐이다. 더구나 작가는 알루미늄 자체를 부식시켜 추상적인 얼룩을 만들었다. 그린 것이 아니라 면 자체의 화학적 변화로 형상이 생겼다. 그만큼 조형의 물질적 특성이 강조됐고 ‘그림을 통해 상상의 세계를 보려던 관성’은 그 앞에서 무참 히 깨지고 만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그렇다면 이런 작품은 어떤 종류의 미적 감 정을 우리에게 선사하는가 하는 것이다. 미술작품도 하나의 가구나 기타 사물 같은 물질이라면 우리는 거기서 일반 물질에서 느끼는 미적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미적 감정을 느낄 것이다. 이를테면 아이가 아끼는 오 래된 구슬에서 느끼는 친밀감 같은 것, 또는 풍화된 바위로부터 우리가 느끼게 되는 무던함의 미학 같은 것, 그런 것을 느끼기 쉬울 것이다. 평 소 지나치는 사물에서도 아름다움은 살아 숨쉬고 있다. 그러니까 물질 자 체가 갖고 있는 아름다움, 그것을 예술행위를 통해 새삼 환기시켜주는데 오순자 특유의 미학이 있다. 미를 환상을 통해 확인하지 말고 있는 그대 로의 현실을 통해 확인하자는 입장이다.
‘헛된 장식’ 버린 꾸밈없는 아름다움
왜 우리 조상들은 백자를 만들면서 그 위에 온갖 색과 장식으로 치장하지 않았을까? 왜 우리 조상들은 흰 벽과 흰 옷을 선호했을까? 흔히 이집트 벽화는 흰 벽, 그 공백이 무서워 그걸 메우려고 제작된 것이라고 얘기한 다. 우리 조상들은 환상을 만드는 것, 그 ‘헛된 장식’을 싫어했다. 꾸 밈없는 아름다움을 선호했다. 오순자 역시 그의 현대미술 속에 그 전통을 부단히 잇고 있는 작가라 하겠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0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