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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
1997년06월05일 제 1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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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희
내 쉴 곳은 오직 내 집뿐이란 노래가 있지만, ‘내 집’에서조차 변변히 쉴 시간과 장소를 못 찾는다는 이들이 많다. 찜질방이니 수면텔이니 하는 것에서부터 비디오방, 전화방 같은 ‘방’자 돌림 업소가 생겨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 아닐까. 우리 여자들 사이에는 어머니 세대에서부터 다기 능 휴식처로 알려진 곳이 하나 있다. 대중목욕탕. 나도 틈만 나면 대중 목욕탕에 간다.
최근에 단골로 다니기 시작한 대중목욕탕은 내가 매긴 점수로 80점 이상 이다. 요즘 대중목욕탕이야 크고 넓은 건 어디나 비슷하지만 그만큼 깨끗 하기가 쉽지 않다. 부실 시공물만 아니라면 기꺼이 십년 단골을 서약할 만하지만, 역시 너무 시끄러운 것이 탈이다.
여자들은 대중목욕탕에서 대개 세 가지 일을 한다. 씻는 일, 슬쩍슬쩍 다른 사람의 몸매나 씻는 방식을 훔쳐보는 일 그리고 수다…. 내가 단골 목욕탕을 어쩔 수 없이 바꾸는 이유는 그 목욕탕의 또다른 단골(요즘은 ‘회원’이라고도 한다) 수다꾼들 때문인 경우가 많다. 거의 매일 드나드 는 단골들은 비교적 일반 손님들이 몰리지 않는 시간을 택하는 법이고, 그래서 제 집처럼 방만하게 떠들고 웃고 첨벙대는 회원님 군단과 한번 마 주치면 계속 마주쳐야 한다는 ‘대중목욕탕 단골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
그 아주머니들은 첫눈에 전형적인 단골 회원이며, 수다 짝패였다. 내 바 로 옆에 자리를 잡은 적만 두번. 탕 속에 앉아서도 탈의실에 들어서는 그 들의 등장을 알아보고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다. 어디서 어떻게 만나 들 어오는지, 엄청나게 큰 한 쪽의 목소리에 다른 한쪽의 목소리가 어김없이 실려온다. ‘대중목욕탕 단골은 둘셋씩 짝을 지어다닌다’는 단골 법칙 2 를 목격하는 순간이다.
‘대중목욕탕론’‘목욕탕 단골의 법칙’‘수다꾼 때문에 못 살겠다’… 이런 이야기는 아니니 안심하기 바란다. 병치레 끝에 기력이 쇠해서인지, 하필이면 그들 짝패가 바로 곁에 자리를 잡아 떠들어대는데도 여느 때처 럼 그다지 신랄한 마음은 아니었다. 다만, 그쪽을 곱잖은 눈길로 쳐다보 게 될까봐 죽어라 고개를 숙이고는, 목소리만 조금 낮춰줘도 살겠는데 하 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들이, 다른 수다 짝패와는 뭔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두번 째로 이웃하고서였다. 한쪽이 꺼낸 이야기 요점은 친정 어머니에게 지청 구를 들어가면서 대학이며 결혼이며 뒷바라지한 시누이가 은혜를 모른다 는 것. 이런 경우, 다른 한쪽은 비슷한 자기 사례나 또다른 사람의 사례 를 들면서 세상의 시누이들과 시집 식구들을 싸잡아 폄하는 것이 수다 짝 패로서의 의무와 책임이다. 그런데 한쪽의 맞장구가 묘했다. “그러게 말 이야. 나도 그래서 우리 올케에게 만날 당부해. 만약에 올케가 잘해준 것 죄 잊어버리고 시건방 떨면 옆구리 찔러 달라고 말야. 사람이 참, 남 잘 해준 건 기억해도, 자기 잘해 받은 건 왜 그렇게 잘 잊어버리게 되는지 몰라.” 동문서답 비슷하게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런 식이다. 한쪽이 욕을 섞어가며 누군가를 헐뜯으면, 한쪽은 자기 반성으로 이야기를 몰면 서 상대의 분김을 빼주는 것이다.
그 이후 나는 마음잡고 그들 짝패를 훔쳐보기 시작했다. 어쩌다 목소리 큰 이가 분에 겨워 분김 뺄 기회를 주지 않으면 목소리 작은 이는 묵묵히 들으면서 응, 응, 그럼, 그럼, 건성으로 대답한다. 그러다 문득 자기, 거 기 가야 된담서? 어서 등이나 내밀라고 종용한다. 목소리 큰 이를 돌려앉 히면서 얘기의 방향도 돌려진다. 쓱쓱 등을 미는 목소리 작은 이의 조근 조근한 몇 마디가 이어지면 혈압이 급강하하듯 목소리 큰 이의 그날 수다 는 막을 내리는 것이다.
나에겐 그들 짝패가 내가 가진 어려운 문제들의 중요한 힌트로 읽힌다. 좀더 그들을 훔쳐보고 싶다. 그들이 목욕탕을 옮기지 말아야 할 텐데. 조 바심까지 난다.
이상희/ 1960년생, 부산여대 국교과 졸, 시인, 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잘가라 내청춘>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0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