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정성
1997년06월05일 제 160호 한겨레21

`메트로놈’에 담은 일본인의 우정

“이루본에써 코레트 코루인데 바드시게스므니까?”

이정화(29)씨는 슬그머니 웃음이 삐져나왔다. 콜렉트콜을 알리는 일본인 전화교환원의 우리말이 어색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자칫 잊을 뻔했 던 추억의 한자락이 새벽잠에서 깨어나듯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일본어로 대답을 하는데도 힘들게 우리말을 계속하는 교환원의 친절이 더욱 그 기 억을 뚜렷하게 했다. ‘그때 나는 어눌한 일본어로 얼마나 자주 일본사람 들을 웃겼을까.’

가스가이 야스하루. 예절바르고 매사에 숨김이 없는 담백한 일본인이었다 . 그가 아니었다면 이씨는 잘못된 일본어 발음을 영원히 고치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 유학생 시절 일본어를 배우던 이씨에게 처음으로 따끔한 지 적을 해준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는 “일본어 잘하시네요” 하고 칭찬만 하던 다른 일본사람들과 달랐다.

이씨가 가스가이를 알게 된 것은, 일본에 유학한 지 1년쯤 지났을 때였다 . 꽃꽂이를 공부하던 이씨는 일본어가 입에 붙자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 를 시작했다. 이씨는 한국인 동료들 가운데 일본어를 잘하는 축에 속했고 , 일본인들도 이씨의 발음이 훌륭하다고 추어올리곤 했다. 그러나 가스가 이는 따끔했다. “이정화씨, 발음을 좀더 분명히 해야겠어요. 말을 빨리 할 때면, 구렁이 담넘어가듯 해 뜻을 알아듣기 어려워요.” 다른 일본인 들은 그때서야 가스가이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씨는 발음을 고쳐보려고 애썼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일본인 동료들이 도와주는데도 별 진전이 없었다. 그런 이씨에게 어느 날 가스가이가 탁상시계처럼 생긴 물건 하나를 건네주었다. 메트로 놈이었다. “플룻을 배우느라 쓰던 건데 아마 도움이 될거예요. 아, 이, 우, 에, 오, 이렇게 딱딱 끊어 천천히 발음연습을 해보고, 메트로놈의 속 도를 점점 빨리하면서 연습해봐요.”

가스가이는 자상한 선생이기도 했다. 어떤 날은 햄버거 가게에 함께 앉아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는 줄도 모르고 몇시간 동안 발음교정을 도와주 기도 했다. 이씨는 그를 통해 일본어가 아닌 일본과 일본인을 배웠다고 한다. “가스가이의 지적이 없었다면, 일본사람들이 일본어를 잘하는 외 국인에게는 결코 칭찬의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거예 요.”

이씨는 아직도 일본어에 자신이 없다. 콜렉트콜 전화를 받던 날도 일본어 를 제대로 한 것 같지 않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메트로놈을 건네주며 했 던 가스가이의 충고를 혼잣말로 중얼거려 본다. “아, 이, 우, 에, 오, 이렇게 딱딱 끊어 천천히 말해봐요.”

유강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05일


커버스토리 포커스 문화시대 특집 지난호 전체보기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