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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
1997년06월05일 제 1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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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칼은 이제 무기가 아니다. 그는 칼을 통해 앞선 검객의 정신을 되살린다.)
짚단 앞에 서면 칼이 된다. 발끝에서 올라온 살기가 팽팽하게 조여진 신 경줄을 타고 손끝으로 모인다. 저걸 베어야 내가 산다. 생명없는 짚단이 지만 칼 앞에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그는 그걸 느낀다. 깊은 호흡, 힘줄이 돋아나는 팔뚝, 그리고 외마디 기합. 마침내 서슬퍼런 칼이 하늘을 가르고 짚단을 베어들어간다. 그 찰나의 순간에 그는 그대로 칼이 다.
칼보다 먼저 주먹을 배우다
이영식(48). 그는 검객이다. 그것도 1천여년 전 신라의 검객이다. 전쟁터 에서 나라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칼을 휘두르던 그 옹골찼던 병사 다. 칼을 잡은 마음가짐이 그렇고, 칼을 쓰는 법이 그렇다. 그는 신라검 법에 홀려 절벽 같은 세월을 뛰어넘었다. 검법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됐다는, 그러나 지금은 역사책으로만 전해오는 그 검법을 되살리기 위한 도전이었다. 그 시간여행에서 그는 끝내 비술을 훔쳤다.
짚단이 세 조각으로 베어졌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그리 고 수평으로. 허공을 가르는 칼바람에 추호의 망설임도 없다. 일도삼단. 바닥을 뒹구는 짚단의 주검 위로 지푸라기 몇개가 표표히 떨어진다. 신경 줄은 아직도 팽팽하다. 칼을 거둬들일 때의 동작이 불을 다루듯 신중하다 . 짧은 원을 그리며 정확히 허리께의 칼집을 찾아든다. 그렇게 칼날을 갈 무리하고서야 그는 살심에서 벗어난다.
이영식은 우리의 전통검법을 가장 완벽히 되살린 무도인으로 꼽힌다. 무 도인으로서 30년을 사는 동안 꼭 절반을 칼과 함께 한 열매다. 강하고 빠 른 움직임,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의 생명을 노리는 현란한 손바꿈을 특징 으로 하는 우리의 검법은 그렇게 다시 태어났다. 그는 그럼으로써 총과 대포가 판치는 세상에서 무사로 살아남았다. 칼 한자루에 생명을 걸고 적 진 속으로 뛰어들던 선인의 용맹함은 지금 그의 칼날 위에서 숨쉰다.
그는 칼보다 먼저 주먹을 배웠다. 어린 시절 그는 몸집이 작고 얼굴이 곱 상해 괜한 시달림을 받았다고 한다. 집적거리는 아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무술을 가르친다는 동네 체육관엔 모조리 들어갔다. 유도에서 합기도로, 당수로. 부모가 제과점을 운영해 살림은 넉넉했고, 소년은 마음껏 무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운동신경이 유난히 발달한 소년에게 체육관은 놀이터 비슷했다고 한다. 남들은 한달 걸려 배우는 동작을 사흘 만에 깨우칠 정 도였다.
소년은 동네 주먹대장이 됐다. 덩치만 믿고 거들먹거리는 아이들은 모두 그에게 혼쭐이 났다. 상대의 주먹이며 발길이 슬로우비디오처럼 보였다는 데, 그 경지를 짐작하기 힘들다. 중고교에 다니는 동안 2~3년 선배는 그 냥 친구처럼 대했다. 그는 주먹만 세면 다 그랬던 시절이었다며 씨익 웃 는다. 소년은 싸우면 반드시 이겼고, 그것은 소년에게 빛나는 훈장 같은 것이었다.
대학에 들어간 그는 연애에 실패하자 홧김에 해병대에 자원했다. 마침 월 남전이 한창이었다. 그는 아무런 동요없이 남의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리 고 거기서 진짜 무서운 상대를 만났다. 베트콩은 아니었다. 사실 적군은 그림자도 보지 못했다. 현대의 전쟁이란 애초 적을 보며 싸우는 게 아니 니까. 그것은 자신이었다. 포격소리와 비명만이 들리는 전쟁터에서 유일 한 원칙은 살아야 한다는 열망이었고, 자신은 너무 나약했던 것이다. 제 대한 뒤, 그는 미련없이 싸움의 세계를 떠났다.
칼의 역사를 얘기하는 그는 자못 비장하다. 거기에는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가 숨어 있기 때문이란다. “처음 신라의 화랑들이 연마했던 신라검 법(본국검법)이 있었으나 그게 마지막이었다. 고려시대에 들어 화약이 발 명되고, 조선시대에서는 무인을 천하게 여기는 풍토 때문에 우리 검술의 맥이 끊어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검술의 필요성을 절감했 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 통에 우리에게서 칼만드는 법과 칼쓰는 법을 배워간 일본이 칼의 종주국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칼 아래 얼마나 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었는가.”
<무예도보통지>가 던진 수수께끼
그에게 칼은 더이상 무기가 아니다. 먹을 게 없으면 빼앗아 먹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야 칼이 곧 정의였겠지만, 지금은 아무런 사회적 보호도 받 지 못한다는 걸 안다. 사실 무사가 사라진 시대에 칼이란 장신구 이상의 효용이 있을 턱이 없다. 그는 칼에서 무사의 정신을 느낄 뿐이다. 칼쓰는 법을 되살리는 것도 따지고 보면 칼쓰는 정신을 되살리는 것이다. 그에게 칼은 조상의 얼이 담긴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칼은 검도에 입문하면서 만났다. 죽도를 들고 상대를 후려치면서 갈증 같 은 걸 느꼈다고 한다. 우리의 검법은 없는 것일까. 5천년 역사를 지탱해 온 민족의 검법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갈증을 풀어줄 스승도 교재 도 없었다. 그렇다고 산 속의 도인을 찾아 헤맬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는 도장에 홀로 남아 칼쓰는 법을 다듬으며 칼의 이치를 캐들어갈 수밖 에 없었다.
어느 날 소문이 들려왔다. 칼로 명함을 자르는 신검이 있다는 거였다. 그 는 그 소문의 주인공을 수소문해 집으로 찾아가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스승은 늙고 병들었고 가난했다. 라면으로 근근히 하루 세끼를 때우는 형 편이었다. 검객은 요즘 같은 세상에선 실패자라고 믿는 건 그때부터다. 스승은 짚단도 벨 수 없을 만큼 기력이 없었다. 스승은 그저 <무예도보통 지>라는 신라의 검보가 있으니 찾아 배우라는 말만 툭 던질 뿐이었다. 그 러면서 “네 인상이 무사 인상이다. 눈매나 웃을 때 입모습이 그렇다”는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남겼다.
지금의 워커힐 근처 강가에 수련장을 마련했다. 폐농가를 개조한 그곳에 서 그는 가혹할 정도로 스스로를 다그쳤다. 칼 쥐는 자세에서 칼 내리치 는 각도, 발 옮기는 법 따위를 <무예도보통지>를 보며 익혔다. 규장각에 서 복사해온 그 검보는 선인의 비술을 수수께끼로 내놓았다. 무엇보다 칼 쥐는 자세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검보의 가르침은 변화무쌍한 손바꿈이었 고, 그것은 지금까지 배운 검도의 가르침과 달랐다. 그게 어떤 상태에서 도 칼을 쓸 수 있도록 한 실전무공임을 깨달은 것은 시간이 훨씬 지나서 였다.
칼의 이치를 캐들어가면서 한때 외도를 하기도 했다. 칼을 칼집에 꽂은 상태로 콩을 반토막낼 수 있는 경지에 올랐을 때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출연 요청이 들어왔다. 그는 허영심을 주체할 수 없 었다. 텔레비전 쇼프로그램에 나가 보란 듯이 명함도 자르고 콩도 잘랐다 . 그러나 녹화가 끝난 뒤, 그는 처참했다고 한다. 서커스단의 원숭이가 됐다는 후회가 밀려왔고, 검객의 자존심은 상처를 입었다.
짚단이 철벽으로 변할 때
짚단도 때로는 철벽이 된다. 아무리 날카로운 칼이라도 베어들어가는 각 이 맞지 않으면 짚단을 벨 수 없다. 그저 힘과 빠르기만 앞세운 베기는 그래서 칼질에 불과하다. 그는 짚단이 생명체로 보여야만 칼쓰는 법을 쓸 수 있다고 한다. 짚단을 베는 게 아니라 칼에 저항하는 물체를 베는 게 법이기 때문이다. 저항하지 않는 물체를 베는 건 무사의 도리가 아니다.
그는 아직도 칼쓰는 법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걸 아쉬워한다. 수련이 짧아서라고 자위하지만 그게 언제 끝날지 자신이 없다. 시범을 보일 때 실수도 하고 발이 엇갈리기도 하고, 자세가 흔들리기도 한다. 그럴수록 칼이 무섭다. 칼의 길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이 두렵다. 언제 가는 자신이 짚단이 될지 모른다는 예감에 떤다. 그래도 그때가 되면, 그 는 자신을 베어버릴 작정이다. 그는 이제 자신에게 칼을 겨눈다.
사진 이정용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0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