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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재에서 |
1997년06월05일 제 1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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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만 감으면 급히 휘갈겨 쓴 글자 뒤로 처절한 영상들이 활동사진 되어 흘러갑니다. 등을 겨눈 ‘인민의 군대’의 총에 맞아 죽은 아녀자, 옥수 수 몇 주먹을 얻고자 엉뚱하게 자신의 부인을 죽인 남편, 먹거리를 주지 않는다 하여 장모와 처제를 죽이는 사위, 거리와 장터 그리고 역전을 헤 메는 나이어린 꽃제비들. 굶주림의 극점에 나타난 그들의 광기가 클로즈 업됩니다. 가끔씩 당 간부들의 살찐 몸뚱아리가 그위로 스쳐지나 갑니다. ‘인민’의 나라에 ‘인민’은 이미 없었습니다.
아무리 잔상을 쫓으려 해도 부질없습니다. 다시 편지를 집어듭니다. 이제 그 편지는 더이상 원고가 아닙니다. 무수한 화면이 스쳐지나가는 스크린 일 뿐입니다. 그곳에 비쩍 마른 한 사람이 서있습니다. 멀찌감치 고뇌에 찬 눈으로 광기의 현장을 지켜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북에서 날아온 한 움큼의 편지는 필자의 머리를 그렇게 흔들어 놓았습니다. 이미 들은 이야기라고들 할 지도 모릅니다. 지금까지 탈북자들이 증언한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일리 가 있는 지적입니다. 그러나 <한겨레21>이 그의 증언에 주목하는 이유는 허다합니다. 우선 그는 지금도 죽어가는 인민 한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며 그 자신도 조금씩 스러져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이는 지금까지 (탈출에) ‘성공한 사람’이 전하는 증언의 단편성과 작위성을 뛰어넘어 증언의 객관성과 현장성을 확인해줍니다.
강이 흘러가는 방향과 물살의 세기 그리고 오염 정도 따위를 알려면 강 한가운데를 살펴야 합니다. 지류와 합하여 생기는 여울이나 강변에 떠다 니는 쓰레기, 혹은 곁으로 흘러나온 샛강 따위를 보고 강을 판단해선 안 됩니다. 북한이라는 강의 본류는 바로 ‘인민’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권 력은 그 위에 띄워진 배일 뿐입니다. 물에 발 한번 안담갔을 황장엽씨의 증언보다 강의 한가운데를 지금도 살아가는 그의 증언이 절실하게 다가오 는 이유는 그 점에서 당연합니다.
둘째로는 여과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안기부라는 권력의 여과장 치를 거친 증언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의도성은 설득력 없는 전쟁도발설, 소문 차원으로 마구 뱉어지는 원조곡물의 군량미 전용설, 핵 공격 가능성 등에서 확인됩니다. 탈북망명자들은 자신이 살아온 현장을 전하기보다 이곳 권력자들의 이야기를 대신하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생각 을 가끔씩 갖게되는 건 그런 연유입니다.
거울이 비추는 세상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겉모습만 보여줍니다. 미워하 는 눈으로는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흠만 잡으려 합니다. 애정만이 상대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는 한때 제3국에 살다가 북한으로 돌아갔습니다. 그에게 북의 체제와 이념은 그리고 6·25로 인한 괴멸적 파괴를 극복한 그곳 인민은 무한한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었을 겁 니다. 그는 지금 그가 사랑했던 것들이 모조리 파괴되고 있는 그 현장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세번째 이유입니다.
이 편지에서 북한의 붕괴를 읽지는 말기를 부탁드립니다. 집권자에 의해 언제든 농락당할 수 있는 인민의 삶 자체를 같은 ‘민’의 입장에서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강요된 적개심과 연민이 얽혀있는 혼란에서 벗 어납니다. 사랑과 미움을 가려 ‘민’의 선택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희망하는 것이 없는 사람에겐 절망도 없습니다. 절망은 역설적이게도 희 망의 존재를 확인해줍니다. <한겨레21>은 이 편지를 ‘1997년5월, 절망의 기록’이라 이름하렵니다. ‘민’의 힘으로 그것이 희망으로 되살아나길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한겨레21 편집장 오귀환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0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