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1997년06월05일 제 160호 한겨레21

‘포스트 왕회장’은 누구?

(사진/5월24일 현대그룹 창립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정씨 가문의 사람들. 왼쪽부터 정몽헌 그룹 부회장, 정몽구 회장, 정세영 자동차 명예회장, 둘 건너 정주영 명예회장.)

 현대=정주영. 지난 5월25일 창립 반세기를 맞은 현대그룹과 창업자인 정주영(82) 명예회장의 관계를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정 명예 회장을 떼어놓은 현대는 생각할 수 없다. 주위의 부축을 받아야 거동이 가능할 만큼 쇠약해졌지만 그는 여전히 한국 재계순위 1위의 거대 기업집 단인 현대의 ‘절대군주’로 군림하고 있다.


‘압축적 고도성장’의 상징적 금자탑

현대의 반세기는 정 명예회장의 기업인생이다. 그의 기업인생은 선진국이 수백년에 걸쳐 이룩한 자본주의적 근대화 과정을 불과 수십년 만에 달성 한 한국경제의‘압축적 고도성장’ 과정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런 만큼 그 에게는 항상 관치경제 혜택 속에 거대재벌을 일구었다는 비난이 따라 다 니지만, 그는 자기 발(운동화 300mm)만큼이나 한국 경제에 큰 발자국을 남겼다.

현대의 뿌리는 정 명예회장이 소년시절 농사꾼의 길을 거부하며 네차례나 가출을 시도한 끝에 시작한 쌀장사와 자동차수리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현대라는 간판을 내건 것은 47년 현대토건(현 현대건설)의 출발이 다. 이후 50년 동안 그는 불도저 같은 저돌성으로 ‘현대식 경영’이라는 독특한 자기만의 경영방식으로 건설, 조선, 자동차, 반도체에서 숱한 신 화를 창조했다.

정 명예회장은 67년 현대자동차를 설립한 뒤 합작선인 포드와의 결렬을 감수하며 자동차 독자개발을 추진하는 도박을 감행한 끝에 76년 1월 결국 국산 최초의 고유모델인 포니자동차를 개발하는 ‘포니 신화’를 창조했 다. 국내에서는 그 누구도 엄두를 못냈던 조선업에 일찍이 눈을 돌린 그 는 71년 9월 차관을 얻기 위해 영국 런던으로 날아갔다. 버클레이 은행장 이 선박 건조 경험이 없다며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자 그는 주머니에서 5 백원짜리 지폐를 꺼냈다. “이것이 거북선이오. 우리는 영국보다 3백년 앞선 1500년께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소.” 답은 “오케이”였다. 그는 73 년 한편에선 도크를 건설하고 다른 한편에선 26만t급의 초대형 유조선 두 척을 한꺼번에 건조하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내는 신화를 창조했 다.

75년에는 아우 정인영(현 한라그룹 명예회장)씨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동 건설시장에 진출해 공사비가 당시 정부예산의 50%(9억4천만달러)로 금세 기 최대 역사로 불렸던 사우디 주베일 항만공사를 수주했다. 중동에서 벌 어들인 막대한 오일달러는 중동 붐과 함께 석유파동을 넘길 수 있는 힘이 됐다. 83년엔 바다를 메워 거대한 옥토를 만드는 서산 앞바다 간척사업에 착수했다. 간만의 차가 워낙 커 20만t 이상의 돌을 쏟아부어야 방조제 물 막이공사가 가능한 난공사였다. 그러나 그는 고물 유조선으로 거센 물살 을 가로막는 기상천외의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이렇게 탄생한 `정주영의 ‘유조선 공법’은 미국 <뉴스위크>와 <타임>에 의해 전세계에 소개됐다.


우주항공 등 새로운 성장산업 개척

현대는 매출액을 비롯해 자산, 부채, 자기자본, 종업원수, 계열사수 등 기업에 관한 한 거의 모든 것에서,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정상 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현대는 창업 초기부터 일관되게 건설, 자동차, 선박, 기계, 철강, 석유화학 같은 중후장대형 중화학공업을 고집했다. 현 대맨들은 흔히 “코흘리개들의 주머니 돈으로 장사를 하는 기업과는 질적 으로 다르다”는 말로 자부심을 표현한다. 50개 계열사 중 건설, 자동차, 조선 등은 수십년간 국내1위를 지켜오고 있다.

그러나 한국경제의 ‘살아있는 신화’ 정주영에게는 공(功)과 함께 과(過 )도 상당하다. 그에게는 항상 정경유착의 상징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녔 다. 4·19 혁명 이후 민주당 정부 때에는 부정축재자로 몰리기도 했다. 군사독재를 바탕으로 제한된 자원과 외자를 일부 대기업과 수출 부문에 집중하여 압축적 고도성장정책을 추구한 박정희 정권과 18년 내내 그는 밀월관계를 유지하며 개발의 선봉장으로서 특혜를 누렸다. 은행 빚에 의 존한 문어발식 사업확장으로 상징되는 재벌의 정상에 올라 있는 현대는 때문에 경제력 집중의 장본인이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정 명예회장은 특히 재력과 거대기업의 조직력을 무기로 국민당을 만들어 92년 14대 대통령 선거에 뛰어든 것은 개인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뭇 재벌들로 하여금 정경일체를 꿈꾸게 하는 빌미를 제공한 것 이기 때문이다.

정 명예회장은 96년 1월 그룹의 대권을 차남인 정몽구 회장(MK)에게 맡겼 다(장남 몽필씨는 82년 교통사고로 사망). 미래의 50년도 역시 정상을 지 킬 수 있느냐는 MK를 비롯한 그의 후계자들 몫이다. MK 회장은 지난 5월2 4일 창립 50주년 기념사에서 ‘21세기를 창조하는 기업, 현대’라는 비전 과 경영방향을 천명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첨단기술의 개발이다. 우주 항공, 정보통신, 신소재 등 미래사업을 새로운 성장사업으로 개척하고, 첨단기술로 기존 산업의 부가가치를 높이는데 힘쓰겠다.” 다가오는 21세 기에는 중화학공업에 치중해 온 기존의 사업구조만으로는 정상의 자리를 지키기 어렵다는 솔직한 자기고백이다. 글로벌 경영을 위한 노력이 다른 기업에 비해 부족했다는 지적도 많다.


정세영 명예회장과 자동차의 처리는…

그러나 왕회장의 구실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후계구도의 정 리라는 ‘마지막 `짐’이 남아 있다. 그룹 안팎에서는 ‘포스트 왕회장’ 의 대통을 누가 잇게 될 것이냐에 관심이 끊이지 않고 있다. 6명의 왕회 장 아들들이 그룹경영에 참여하고 있지만 대표주자는 MK회장과 4남인 정 몽헌 부회장이다. MK는 정공 자동차써비스 산업개발 인천제철 강관 우주 항공 등 6개 계열사를, 정 부회장은 건설 전자 종합상사 상선 엔지니어링 정보기술 금강기획 현대유티콘스 등 8개 계열사를 각각 직할하며 그룹을 사실상 양분하고 있다. 3남 몽근씨가 금강개발산업, 6남 몽준씨가 중공업 , 7남 몽윤씨가 해상화재보험, 8남 몽일씨가 종합금융, 조카 몽혁(정 명 예회장의 넷째동생인 신영씨의 아들)씨가 석유화학과 정유를 각각 맡고 있지만 MK나 몽헌씨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한편에서는 “장남은 곧 부 모”라는 엄한 유교적 가풍과 이미 그룹회장직에 올라 있다는 점을 들어 ‘MK 대세론’을, 다른 한편에서는 시작이 늦은 전자부문을 맡아 삼성전 자에 버금가는 기업으로 키운 경영능력과 그룹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7 인 운영위원회에서의 세력우위를 들어 정 부회장의 대망론을 편다. 그러 나 ‘포스트 왕회장’을 또다른 1인체제로 보는 시각은 적절치 않다는 지 적이 많다. “지금도 왕회장의 2세들은 자기영역별로 독립경영을 하고 있 다. 창업주 사후 그룹분리가 불가피하더라도 이미 MK회장과 정 부회장이 그룹을 반씩 맡고 있는 현실에서 누가 후계자가 되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현대그룹 한 임원은 왕회장 사후 그룹분리가 없더라도 회장 1인 체제보다는 형제들이 소그룹을 이루면서 현대라는 상징적 이름만 공유하 는 연방제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한다.

동생인 정세영 현대자동차 명예회장의 땀과 꿈이 짙게 스며있는 자동차의 처리도 왕회장의 몫이다.

곽정수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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