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분석
1997년06월05일 제 160호 한겨레21

이한동 고문의 ‘바닥 표 훑기’ 24시간 밀착취재

(사진/`모내기로 시작한 아침.' 경기도 화성군의 한 논에서 경기지역 농어민 후계자들과 건배를 나누는 이한동 고문.)

“하루 다섯시간만 잘 수 있어도 좋겠어.” 5월23일 오전 5시. 사람들이 잠에 빠져 있을 시간에 전남 순천의 한 관광호텔 사우나에서 하루를 시작 하는 신한국당 이한동 고문은 이렇게 말을 던졌다. 10여명의 예비주자들 이 7월로 예정된 당내 경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세확장에 몰두하고 있는 대권전선. 그 사활을 건 싸움에서 일찌감치 ‘밑바닥’에 눈을 돌린 이 고문은 숨돌릴 틈도 없이 바쁘다.


환호와 썰렁함의 끝없는 반전

전날인 22일 오전 7시20분 광주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전남 지구당 순방 에 나섰던 이 고문은 무안, 목포신안 갑·을, 영암, 해남, 강진, 보성 등 7개 지구당을 거치는 강행군을 끝낸 뒤 밤 11시가 넘어서야 이곳 순천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곧바로 이어진 지역 유지 및 지구당 위원장들과 간담회를 치렀다. 자정이 넘어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었던 그는 이른 새벽 부터 대권을 향한 걸음을 또다시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목욕탕을 나선 오전 5시40분. 그가 묶고 있던 방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찾 아들기 시작한다. 지역의 숙원사업과 현안들을 전하려는 순천 유지들이 대부분이다. 숨가쁘게 의견을 듣고 오전 7시가 되자 다시 8층에 마련된 조찬장으로 발을 옮긴다.

순천 갑·을 지구당 당직자들과의 조찬장. 이 고문은 우선 이곳의 특수한 지역 정서를 파고들기 시작한다. “여당이 야당일 수밖에 없는 곳에서 적 진에 투하된 낙하병과 같은 부담을 안고 어려운 시기를 견뎌온 여러분에 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 하지만 12월18일 여러분의 그 좌절이 정리 되고 희망찬 새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이어 지역공약을 쏟아 놓는다. “서울순천간 전라선을 복선화하고 순천에 3만평 규모의 공단을 세우고… .” 그리고 분위기가 적당히 고조되자 대의원들에게 자신을 본격적으로 내세우기 시작한다. “30여명의 정치인이 검찰에 불려다녔지만 나는 단 한번도 돈과 관련해 신문 지면을 더럽힌 적이 없다.”“청와대는 정치 연 수원이 아니다. 지혜와 정치적 경륜을 갖추고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지도 자가 과연 누구인가.” 영입파에 대한 적절한 견제와 자신에 대한 지지를 동시에 호소한다.

이 고문이 목소리를 높이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측근들의 몸놀림이 더 욱 바쁘다. 대의원들과 명함을 주고 받으며 당직자에게 “오늘 참석한 대 의원들 명단을 달라”는 부탁도 이어진다.

조찬이 마무리된 8시44분. 이 고문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선다. 참석자 들과의 힘찬 악수를 잊지 않는다. 때론 껴안다시피 하기도 한다. 다음 목 적지는 60km 떨어진 전남 고흥 지구당. 대형 벤 승용차에 몸을 싣는다. 그속에서도 쉴 틈이 없다. 고흥의 정서와 현안, 지구당 위원장의 성향 등 을 수행원들로부터 보고받는다.

9시45분. 한시간 이상을 달려 고흥 지구당을 찾았을 때 순천과는 분위기 가 사뭇 달랐다. 사무국장이 환영의 꽃다발은 전했지만 썰렁했다. 겨우 9 명의 당직자들만이 모였을 뿐 위원장은 서울에 일이 있다는 이유로 아예 나타나지 않았다. 이 고문의 한 측근은 “당에서 모이지 말라고 계속 지 시가 내려온다”며 “이 대표가 너무 쑤셔대는것 같다”고 불만을 나타낸 다.


“열명 이상 모이지 말라고 당에서 내려왔다”

이 고문의 표정엔 실망감과 서운함이 스친다. 그러나 9명의 대의원을 상 대로 설득을 시작한다. “항상 고흥을 머리 속에 그리고 있었다”고 운을 뗀 그는 순천에서와 비슷한 내용을 강조한다. “대선이 끝나면 호남 전역 에 새로운 바람이 불 것이다. 좌절할 수만은 없다”며 동참과 지지를 호 소했다. 물론 “연륙교 건설과 시내 4차선도로 확장”등 숙원사업에 대한 언급도 빠뜨리지 않았다. 하지만 당원들은 엉거주춤한 표정이다. 이 고문 에 대한 생각을 묻자 한 당직자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대단하게 생각한 다”고 말했다. 또다른 당직자는 “아직 정확히 누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눈치보기를 할 수밖에 없다”고 솔직히 털어놨다.

서둘러 여수시로 이동하는 이 고문. 피곤한 듯 짬짬이 승용차 안에서 눈 을 감는다. 12시15분 예정보다 다소 늦은시간. 한 예식장에 마련된 여수 ·여천 순방 간담회장은 아까와는 전혀 달랐다. 예식홀에 1백20여명이 모 였고 환호도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여천지구당 김영로 위원장은 “후 보 중에 후보, 용 중에 용 이한동 고문을 환영한다”며 “가장 유력한 대 권주자인 이 고문에게 큰 힘이 돼 주자”고 지지의사를 확실히 했다.

이런 분위기에 고조된 이 고문은 ‘적자론’을 내세웠다. “나는 17년 동 안 당과 운명을 함께 해온 이 당의 적자다. 또 여기 모인 사람들 대부분 이 그 적자라고 믿는다. 모든 적자들의 뜻과 열망을 모아 대권에 당당히 나서겠다.” 박수와 함성이 터진다. 열기가 뜨겁자 이 고문은 일정까지 변경했다. 2시로 예정됐던 여수시장 방문 계획을 취소하고 대신 여천 지 구당 방문으로 돌렸다. 지지자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은 인지상정인 모양 이다. 여수만 들렀다는 여천 지구당원들의 불만에 떠밀린 것이다. 갑자기 들른 곳이지만 지지자들이 들어차고 한 여성당원은 “청와대에 들어가 쓰 시라”며 직접 만든 휴지 덮개를 선물하기도 했다.

일행은 상당히 고무됐다. 이 고문은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 기대 이상이다. 17년 동안 여당 생활을 하면서 쌓아온 수많은 인맥을 결 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대다수 대의원들이 계속 여권에 뿌리를 대온 이 지역 정서로 볼 때 ‘적자론’을 내세우는 이 고 문을 지지할 것이라는 판단이다. 이명진 특보는 “이번 지구당 방문으로 적어도 광주전남지역 대의원 9백30명 가운데 50% 이상은 얻을 수 있을 것 ”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2시55분 광양 지구당에 도착하자 분위기는 다시 반전된다. 주택가 2층에 위치한 사무실에는 위원장을 비롯해 10명 남짓한 당직자들만이 있 었다. “당에서 열명 이상 모이지 말라는 전통이 내려왔다”는 쑥덕거림 도 들린다.


서울 도착 뒤 “쉬고 싶다” 일정 취소

20여분 동안 지지를 호소하는 열변을 토한 이 고문. 4시에 출발하는 서울 행 비행기 시간에 맞추기 위해 황급히 여수공항으로 이동했다. 비행기에 오른 이 고문은 몹시 지쳐 보였다. 방문 성과를 묻는 질문에 “어려울 게 있나. 말을 많이 하는 것 말고는… 진인사 대천명”이라고 짤막하게 답했 다. 비행기 안에서 이 고문은 깊은 잠에 빠졌다. 서울 도착 뒤에도 “쉬 고 싶다”며 예정된 일정을 취소하고 집으로 향했다.

모처럼 하루 저녁 집에서 푹 쉰 탓인지 24일 이른 아침부터 경기도 화성 군 송산면의 한 논에서 경기지역 농어민 후계자들과 모내기로 하루를 시 작한 이 고문은 특유의 힘이 다시 넘쳐나는 듯했다. “모든 후보가 농민 을 아낀다고 하지만 정작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없다.” 최대 경쟁자인 이회창 대표가 당에 묶여 있는 동안 바닥표를 최대한 훑으려는 이 고문의 잰걸음은 이렇게 계속되고 있다.

신승근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6월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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