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경의 우리맛 기행
1997년05월29일 제 159호 한겨레21

수제비

모내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농사철로 접어들면서 제몫을 톡톡히 해내는 먹거리가 수제비와 막걸리가 아닌가 한다. 어디서나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수제비는 먹고나서 잘 꺼지지도 않아 뚝심있는 먹거리로도 손꼽힌다. 산 밭에 고추모종 심거나, 논에 모내기를 하는 곳에서는 점심이나 새참 때가 되면 큼직한 소쿠리에 항아리를 담아 머리에 이거나 지게에 지고 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내려놓고 보면 가마솥에서 방금 담아온 따끈따끈한 수제비국이 가득 담겼고, 한 옆으로 막걸리병과 열무김치, 그리고 떠먹을 그릇들이 수북하다.

항아리에 담아오는 동안 뜸이 푹 들어 한결 부드럽고 쫀득해진 수제비와, 노릇노릇한 속살이 먹음직스러운 애호박이 드문드문 섞인 수제비국을 한 그릇 받아들고 나서, 풋고추지를 다져넣은 양념장을 한수저 떠넣거나 열 무김치를 얹어 간을 해 먹으면, 그 맛이 초여름 날씨와 딱 맞아 떨어지는 계절식이 된다. 땀을 흥건히 흘리며 먹고나서 시원한 막걸리를 한대접 죽 들이키면, 이 역시 힘든 농사일에 썩 어우러지는 별미다.

그래서 수제비는 아무때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지만, 실은 지금부터 제맛 이 나는 음식이다. 제철 애호박과 풋고추가 나고 햇감자가 날 때, 국물에 조개라도 몇 알 넣어 국물맛을 돋우고, 연한 애호박과 햇감자가 적당이 풀어지도록 폭 끓여 구수한 향이 배어날 때 수제비 맛은 절정에 이른다. 뜨거울 때 먹어야 하는 수제비는 그렇지 않아도 땀이 넘치는데, 톡 쏘듯 영글은 풋고추라도 된장에 찍어 함께 먹으면 땀은 더욱 솟구친다. 이때 시원한 열무김치로 입안을 식혀주며 먹는 맛은 그만이다.

이런 맛을 도심 한가운데서 최대한 살려내,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 비는 곳들이 있다. 패스트푸드의 위협 속에서 우리 고유의 음식들이 건재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그중 내력이 오랜 곳으로, 총리공관 앞에 있는 ‘삼청동 수제비집(735-29 65)’은 올해로 19년째를 맞고 있다. 바지락 조개와 새우살을 넣어 맛을 낸 담백한 국물과 알맞게 반죽해 손으로 뚝뚝 떼어 넣는 고유한 방식의 수제비다. 2인분을 기준으로 자그마한 항아리에 담겨나와 그릇에 떠 먹는 데, 누구에게나 간이 맞고 깔끔한 맛이 제격이다. 찬으로 알맞게 익은 파 란 열무김치와 빨간 배추김치가 따라나온다. 고추지를 다져넣은 장이 별 도로 마련되어 얼큰하고 짭짤하게 먹으려면 따로 간을 하면 된다. 밀수제 비는 4천원, 보다 쫄깃하게 맛을 낸 찹쌀 수제비는 6천원 한다.

더욱 좋은 것은 가는 길이 그만이다. 지하철 경복궁역에서 내리면 도심 한가운데 시원하게 펼쳐지는 경복궁 뜰을 걸어 국립박물관과 민속박물관 을 스치게 된다. 더욱이 길을 건너서면 현대화랑과 금호미술관, 이리자전 시관, 윤갤러리, 국제화랑, 월전미술관 등 문화공간들이 줄줄이 이어져 주말이나 휴일을 이용한 가족 나들이나 외식장소로도 손색 없다. 문화공 간 산책을 마치고 새참을 먹는 마음으로 들러도 좋다.

또 한 곳, 조금 떨어져 있는 인사동 문화마당의 한 가운데에도 ‘인사동 항아리 수제비집(732-0525)’이 있다. 지하철 안국역에서 인사동 네거리 로 내려가는 화랑거리의 중간쯤에서 왼쪽에 있는 이곳은 국물에 무와 다 시마, 파, 마늘 등을 넣어 국물이 달고 짙은 것이 특색이다. 수제비는 기 계로 얇게 밀어낸 것을 쓴다. 값은 한 그릇에 3천5백원한다.


매운탕에 넣으면 고기맛보다 좋아

수제비는 칼국수에서 유래했을 거라는 정도로 그 유래가 다소 막연하다. 다만 농사일과 잦은 전란이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만드는 방법이 칼국수와 크게 차이가 없지만, 반죽을 해 면발을 만드는 것과 그냥 뜯어 넣은 것의 단순한 차이로만 생각하기에는 그 맛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반죽의 소재에 따라서 밀 수제비, 메밀 수제비, 찹쌀 수제비, 감자 수제 비, 도토리 수제비, 보리 수제비 등 이름이 다르고, 국물에 따라서도 미 역 수제비, 멸치 수제비, 밴댕이 수제비, 버섯장국 수제비 등으로 불려진 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얼큰한 매운탕에 뚝뚝 떼어넣은 수제비는 물고기의 단맛과 양념이 흠뻑 배어나 쫄깃하게 씹히는 맛은 고기 대신 씹는 것이지 만, 고기맛을 몇 배나 능가하는 경지로 수제비만이 낼 수 있는 고유한 맛 이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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