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읽기
1997년05월29일 제 159호 한겨레21

의학은 과학인가

황상익/ 서울대 의대 교수(의학사 및 의료윤리학)

의학은 과학인가? 이 질문은 상당히 정치적이고도 논쟁적인 의미를 함축 할 수 있다.

흔히 현대의학을 이른바 ‘과학적 의학’이라고 일컫는데, 이 말 속에는 과학이 아닌 의학이 존재한다는 뜻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의학 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의학 외에는 모두 비과학적 이라고 여겨 불신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과학을 어떻게 정 의하는가에 따라 현대의학 신봉자들의 확신은 흔들릴 수 있다. 실제로 오 늘날의 많은 과학사학자들은 동서양의 전통과학을 과학으로 인정하고 있 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는 현대의학 이외의 많은 의학체계들도 과학적인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제기하는 의학의 과학성 여부는 그런 차원의 문제는 아니다. 여기 에서 논의하는 것은 현대의학이 현대과학의 범주에 속하는가, 또 그에 상 응하는 대우를 받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현대의학 또는 근대의학이라고 일컫는 것은 근대서양이라는 역사적 토양 위에서 발달하기 시작한 독특한 의학체계다. 일부에서는 아직도 ‘서양’ 의학이라는 폐쇄적인 용어를 ‘정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 의학이라는 표현이 말하듯이, 또 범세계적인 활용을 보더라도 이미 세계 사적인 의미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의학의 궁극적인 목표가 환자의 고 통을 줄이고 질병을 예방·치료한다는 점에서 현대의학은 다른 대부분의 의학체계들과 공통적이지만, 현대의학은 그 방법과 내용에서 나머지 의학 체계들과 크게 다르다는 측면에서 독특하다. 그리고 그 독특한 방법과 내 용이란 대개 현대과학적인 것을 일컫는다.

서양의 고대·중세의학은 크게 보아 한의학·인도의학 등 다른 전통의학 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르네상스와 ‘과학혁명기’를 거 치면서 크게 변모하기 시작했다. 베살리우스에서 비롯된 근대해부학과 윌 리엄 하비 등에 의한 근대생리학의 세례를 받으면서 서양의학의 인간관과 질병관은 종래의 전인적(全人的)이며 조화와 균형을 중시하던 데에서 분 절적(分節的)이며 실체론적(實體論的)인 것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리 고 뒤이어 모르가니, 비샤, 피르호우 등에 의해 해부병리학이 확립되면서 서양전통의학은 현대의학이라는 새로운 체계로 탄생했다. 요컨대 초기의 해부학, 생리학, 해부병리학이 그 자체로 근대과학적인 방법과 내용을 담 고 있지만 그것들이 의학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서 의학은 현 대과학적인 특성을 띠게 되었으며, 또 그로써 현대과학의 방법과 성과가 의학에 개입하는 것도 쉬워졌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세계적으로 의학교육은 상당히 보편적인 체계를 지 니고 있다. 나라와 학교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의과대학 교육과정의 절반은 기초의학에, 나머지 절반은 임상의학에 할애된다. 그 리고 임상의학의 교육과 시술 역시 개인적 경험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연) 과학상의 방법과 내용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요컨대 현대의학은 철저히 현 대과학화되어 있는 것이다. 의학과 과학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상 호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할 정도가 아니라 한몸이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타당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선진국에서는 오히려 의학이 지 나치게 자연과학화한 것에 대한 우려마저 나오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학이 과학화하였다는 점은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게 되었다. 그 리고 선진국에서 논의되는 것처럼 의학이 자연과학 일변도로 발전하는 데 에도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런 우려와는 다른 차원에서 의학은 과학 내 에서 적절하고 타당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나라 과학정책 을 대하면서 떠오른다. 올해는 과학입국을 목표로 하여 과학기술처가 탄 생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과기처의 공과에 대해 여러 논의가 있지 만 그동안 의학 분야를 지나치게 소홀히 대해 온 점은 사정을 아는 사람 은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의학의 과학성은 이미 상식인데도 우리나라 과 학기술정책 담당자들은 의학을 본질적으로 개인적 경험에만 의존하는 비 과학적인 것으로 여겨 왔다고 이야기하면 지나친 표현이 될까. 과학고 졸 업생들이 자연과학대학이나 공과대학에 진학할 때는 특혜를 주거나 최소 한 불이익은 끼치지 않는 정책을 펴면서도 의학계열 대학은 거기에서 제 외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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