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재에서
1997년05월29일 제 159호 한겨레21

현철과의 과거 언론은 입을 열어라

광병찬 지난 92년 청와대정무수석비서관에서 공보처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손주환 전 장관은 임명통보를 받은 직후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론은 국가 기관의 하나다. 입법 행정 사법 등 3권과 함께 제4의 권부다. 따라서 언 론은 국정운영에 책임을 져야 한다.”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가능할 법한 언론관이다. 그의 이 공개적인 언급은 그가 언론담당 주무부처 장관이라 는 사실 이전에 한 중앙일간지의 부국장까지 지낸 중견 언론인 출신이라 는 사실 때문에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이 발언은 권력과 태생적으로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할 언론의 기본 적인 입장에 비추어 비난받아 마땅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을 일정 부분 반영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비난보다는 언론의 현실에 대한 자괴감이 앞섰 다.

사실 언론은 그의 언급이 있기 오래전부터 권력기구의 한 부분으로 편입 돼 있었다. 우선 권력의 이동기때마다 특정 권력의 창출에 앞장서왔다. 집권 중에는 정권의 이해를 반영하는데 애썼다. 이를 바탕으로 일부 언론 은 각료의 인사에 개입하고 밉보인 인물에 대해서는 해임 압력을 행사하 기도 했다. 때문에 고위 공직자들은 유력언론과 줄대기에 바빴고 언론의 민원은 정책적 차원이 아니라 정권적 차원에서 검토됐다. 이에 따라 최고 권력자가 화장실에 갈때 들고가는 신문이 무엇인지는 언론계나 공직사회 의 큰 관심사였던 때도 있었다. 게다가 언론은 다른 권력기구와 달리 행 위의 결과에 대해‘면책특권’까지 누렸다.

이 특권이 국민이나 독자와의 관계에서 지워진 기본적인 의무를 포기한 데서 비롯된 것임은 중론이다. 정권의 이해를 관철시키는데 동원된 대가 로 받은 이권인 것이다. 언론의 영향력 돈과 권력 모두를 의미한다. 바로 이 영향력 확대를 위한 언론의 상업성은 이같은 유착을 강화하는 촉매였 다.

현직 대통령 아들을 구속시킨 현실의 참담함 앞에서 새삼스레 언론의 현 실을 돌이켜 보는 이유는 많다. 이른바 ‘김현철 마피아’의 국정 농단과 부정부패, 그로 인한 국가기구의 무력화 따위를 언론은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일부 언론사 간부들은 김씨에 대한 기자의 취재단계에서 부터 자체 검열했으며 일부 출고된 기사마저 지면에서 빼기도 했다. 설사 몰랐다 해도 <한겨레>가 김씨 보도 문제로 최고권력과 힘겨운 법정 싸움 을 벌일 때도 이들은 대부분 외면했다.

외압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사실 김씨는 언론에 대해 피해망상까지 보일 정도였으니 그의 꼬붕들이 얼마나 언론에 압력을 행사했을지는 쉽게 짐작 된다. 이들은 한때 ‘김현철 죽이기’의 3대 세력으로 북쪽의 김정일, 남 쪽의 김대중과 함께 언론을 지목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언론은 변명과 함 께 외압의 구체적인 내용을 털어놔야 한다. 이런 압력은 대개 청와대 비 서실이나 안기부 또는 공보처를 통하기에 그것만으로도 국정 농단의 중요 한 단서다. 그러나 이들은 함구하고 있다.

외압 이상으로 강력한 언론의 자기검열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정통성 대신 물리력을 앞세운 정권 아래에서 가장 혜택을 누렸던 집단 가운데 하나는 언론이었다. 저항하는 언론에게는 오로지 채찍 뿐이 었다. 현 정부에서도 그들은 현철씨에 대한 보도를 포기하는 대신 상당한 반대급부를 누렸던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소극적으로 권력은 각 언 론이 갖고있는 세무비리등 약점을 권력은 눈감았다. 적극적으로는 한 언 론사의 사주가 ‘밤의 대통령’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했다. 각종 국책 사업에 발을 디민 것은 부수적인 혜택일 뿐이다.

작게는 김씨의 사법처리, 크게는 국가권력의 무력화. 이제 언론은 자신의 책임을 엄격히 따져야 한다. 그러나 언론은 너나 할 것없이 대한민국의 위기를 개탄하고 대안을 논할 뿐이다. ‘내 탓’을 말하는 언론은 하나도 없다. 때문에 지금 그들의 모습에선 진지함이나 성실함 그 어느 것도 느 껴지지 않는다. 이때쯤 하릴없이 밤을 지새며 노래하는 논개구리만을 연 상시킬 뿐이다.

그들은 이 공백의 밤을 즐길 뿐인가. 다 파먹은 김치독 같은 지금의 권력 에 기대할 것도, 눈치 볼 일도 없다. 오히려 가만히 있어도 차기 권력을 노리는 정객들이 불나방처럼 달려들어 사랑을 갈구한다. 이 봄밤이 더없 이 즐거워 보인다.

마지막으로 손씨의 지적에 따르길 당부한다. 제4의 권부로서 지금까지 국 정운영의 왜곡에 사죄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그같은 오명의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한겨레21 편집장 곽병찬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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