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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1997년05월29일 제 1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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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 시인·상지대 교수
‘아버지’가 부활하고 있다. <아버지>가 초베스트셀러가 된 현상은 그 자체로는 단순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명퇴’ 등의 신조어를 만들어 내면서 우리나라 사회전반을 휩쓸고 있는 경제 불안 심리에 위축돼 있는 ‘불쌍한 아버지’들에 대한 심정적 동조이며, 소위 ‘신세대’들의 무국 적 문화에 대한 기성세대의 반란으로 읽힐 수 있다. 따라서 ‘아버지 신 드롬’은 그 자체로는 소박해 보인다. 정작 이 작품의 작가는 자신의 작 품이 이 정도의 반향을 불러일으키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 나 이 현상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시대착오적인 복고주의는 여러 가지 의 미에서 대단히 불안하게 느껴진다.
야단치고 훈계하고 싶어하는 이문열
<아버지>에 편승해서, <아버지>를 밀어내면서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차 지한 이문열의 <선택>, 소위 문민정부의 타락에 실망한 대중의 ‘박정희 향수’를 시의적절하게 이용하고 있는 이인화의 <인간의 길>은 이 작품의 작가들이 본격문학을 표방하면서 대중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문학적 권력주의를 숨기고 있다는 점 때문에 <아버지>의 소박함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이 두 영남학파 작가들의 문학행태는 좀더 정치한 문학적 분석 대 상이 돼야 할 터이지만, 우선은 이 두 작가가 아주 미묘한 방식으로 ‘지 역감정’과 한국사회 특유의 무비판적인 ‘보수주의’를 이용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이인화가 상표로 삼고 있는 ‘근대성’과 정반대의 길 로 대중을 몰아가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짚어두어야 할 것 같다.
<선택>의 경우는, 이 작품이 표면적으로는 페미니스트들을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 때문에 더더욱 심각한 문제들을 숨기고 있다. 작가의 궁극적인 관심은 실은 그가 표방하는 것처럼 ‘천박한 페미니즘’을 비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가 궁극적으로 영광을 돌리고 싶어하는 양반주 의를 옹호하기 위해서 가장 약한 적수를 선택한 것뿐이다. 이런저런 논리 의 곡예와 교양주의로 무장하고 있지만, 정작 작가가 3백년 전의 한 현숙 한 부인을 통해서 펼쳐보이고 싶어하는 것은 대단히 사적인 욕망이다. 요 컨대 그는 가문자랑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작품 후반부로 갈수록 작가는 작품의 줄거리에서 벗어나 지리하게 족보학을 늘어놓는다.
작가는 몇차례에 걸쳐 빠져나갈 구멍을 노회하게 뚫어놓고 있기는 하지만 , 실은 페미니즘에 대한 아무런 진지한 관심도 없다. 그에게는 제도에 대 한 모든 항의가 다 불순한 것으로 여겨진다. 페미니즘은 다만, 그가 떠받 들고 있는 구시대적 가치들을 공격하는 여러 가지 태도들 중에서 하나의 태도에, 그것도 가장 공격하기 쉬운 약한 태도에 불과할 뿐이다. 그가 페 미니즘에 대해 보이는 반응은 최소한의 논리도 결한 감정적인 수준에 머 물러 있다. 자신의 태생적 우월함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는 이 영남학파 작가는 ‘근본도 없는 여자들’에게 자신의 세계관을 설득할 생각이 없다 . 왜냐하면 그들은 대화 상대자가 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와 토론을 벌이기 위해서는 족보라도 챙겨들고 나와야 할 판이다. 그는 토론할 생각 이 없다. 그는 야단치고 훈계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반민주적 태도는 이 작품이 택하고 있는 형식에서 너무나 잘 드러난다. 작가는 자신이 ‘전통 적인 이야기 방식’을 택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체의 ‘토론 ’을 차단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야단치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절 대적 우위를 점해야 한다. 즉 자신의 입장을 강요하기 위해서 상대의 혀 를 묶어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가문의식’이 몰고 온 패거리의식
더욱더 문제가 되는 것은, 작가가 페미니스트들을 야단치기 위해서 다른 여성의 입을 빌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현대의 페미니스트들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볼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정보를 거의 독 점하고 있는 여성, 작가 자신 가문의 한 어르신네를 동원하고 있다. 요컨 대 작가는 유령과 살아 있는 여자들끼리 싸움을 붙여놓고 있는 셈인데, 이것이야말로 남성들이 여성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전통적으 로 사용해 왔던 방법이 아니던가.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학적 보수성 그 자체가 아니다. 무서운 것은 이러 한 태도가 우리문화 특유의 관념성을 강화한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생생 한 개인적 주체의 갈망과 유리돼 있는 ‘가문’이라는 관념 속에다 자아 를 구겨넣는다. 체면과 명분. 소위 ‘지역감정’이라고 불리는, 일체의 합리적 비판정신을 고사시키는 전근대적 패거리 의식은 그 ‘가문의식’ 이 무차별로 확장된 경우가 아닌가.
그리고 슬그머니 박정희의 유령이 영남인들의 등 뒤에서 불안하게 떠오르 고 있다. 깜깜한 의식의 밤, 70년대를 기억하는가.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 자는 말인가.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