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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
1997년05월15일 제 1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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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파리코뮌'의 꿈과 신념이 잠들어 있는 `페르 라셰즈'는 진보의 성지 노릇을 한다.)
파리 동쪽 20구에 위치한 페르 라셰즈는 60만 영혼이 잠든 파리 최대의 공동묘지다. 파리에는 이곳 외에도 사르트르, 보들레르, 모파상 등이 누 워 있는 남쪽 몽파르나스묘지, 에밀 졸라, 베를리오즈, 하이네 등이 쉬고 있는 북쪽 몽마르트르묘지 등이 있지만 페르 라셰즈는 이들과 다른 무엇 이 있다.
알퐁스 도데에서 짐 모리슨까지 잠들어
이른 아침이었다. 전철에서 내려 좁은 옆문으로 들어서니 번잡한 담장 바 깥과는 달리 ‘죽음’ 저편 세계로 들어온 듯 고즈넉한 평안함이 기다리 고 있었다. 언덕 위로 ‘돌이불’이 덮인 묘지와 십자가가 끝도 없이 이 어진다. 안내실에서 유명인사들의 무덤 위치를 표시한 지도를 받아보니 작가 알퐁스 도데, 프루스트, 발자크, 몰리에르, 빅토르 위고, 오스카 와 일드, 음악가 비제 쇼팽 로시니, 화가 모딜리아니 들라크루아, 무용가 이 사도라 던컨, 오페라 가수 마리아 칼라스, 샹송가수 에디트 피아프 등 눈 에 익은 이름이 여럿이다. 하나같이 열정적인 삶을 산 이들이다. 파리
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짐 모리슨(60년대 인기 록그룹 ‘도어스’의 리더)도 그들과 함께 했다.
페르 라셰즈가 ‘진보’의 상징처럼 떠오른 것은 바로 이곳에 ‘코뮌 전 사들의 벽’이 있기 때문이다. 1871년 1월 보불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 정부는 프로이센 군대에 항복하고 베르사유로 도망쳤다. 그러자 노동자가 압도적이었던 ‘프랑스 민족방위대’는 파리에 독자적인 지도기구를 구성 한 뒤 3월28일 파리를 접수해 ‘해방구’로 만들었다. 인류 최초의 프롤 레타리아 혁명이었다. 선거를 통해 코뮌위원회가 구성됐고 ‘대중의 이해 에 따른 통치’가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됐다. 그러나 역사의 실험은 두달 을 넘기지 못했다. 4월17일 정부군의 공격이 시작돼 코뮌주의자들은 파리 의 가장 동쪽 끝인 페르 라셰즈까지 밀렸다. 무덤 돌비석을 방패삼아 마 지막 결사항전을 벌였지만 실탄이 떨어져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생포당 한 1백47명은 동남쪽 벽 앞에서 전원 총살당했고 주검은 벽 밑에 판 구덩 이에 묻혔다. 5월28일이었다. ‘역사적 대희망’이었다고들 하는 ‘파리 코뮌’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코뮈나르(코뮌 참가자)들은 두달 동안의 해방기간중 극심한 식량난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낮에는 토론으로, 밤 에는 축제로 보냈다. 코뮌 붕괴 이후 파리시민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이 감행돼 3만명이 피살되고, 4만명이 징역형을 받고, 7천5백명이 알제리 사 막에 버려졌다.
인간·혁명에 대한 열정 새긴 ‘전사의 벽’
그날의 아픔을 되새기며 ‘벽’을 찾아가는 길엔 아침안개가 자욱했다. 옛날에는 찾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벽 위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 몇 번을 묻고, 한참을 헤맨 뒤에야 ‘벽’ 앞에 닿을 수 있 었다.
“코뮌의 죽은 이들에게”라고 써 있는 초라한 비석이 벽에 붙어 있고, 그 아래 시든 장미꽃 몇 송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벽 바로 앞엔 코뮌 부 대를 지휘했다는 폴란드인 장군 야로슬라브 다프로프스키의 묘가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회한이 쇠망한 제국의 잔해처럼 다가왔다.
그들의 숨결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을까 하여 비석을 손끝으 로 더듬을 때 프랑스 학생 3명이 벽을 찾았다. 파리10대학 언어학과 1학 년 세고린 리게(19·여)와 남동생들이었다. 진지한 표정의 리게는 “역사 를 공부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며 “코뮌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 랑스 정신을 나타내준다”고 그 의의를 평가했다. 또 “코뮌은 탄생 때부 터 비극적 결말을 잉태하고 있었던 것 같다”면서도 “파리코뮌은 짧았지 만 인간에 대한 애정과 혁명정신이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벽 앞에서 ‘이들의 꿈과 신념, 고뇌는 무엇이었으며, 어떤 모습이었을까 ’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들이 이곳에서 흘린 1백년 전 핏빛 이 가슴 속에 선연하게 떠올랐다.
파리=글·사진 권태호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