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1997년05월15일 제 157호 한겨레21

무림광풍이 몰아친다

(사진/무협지가 불안한 정치현실의 청량제 구실을 하며 대중적 사랑을 받고 있다. 현재 무협지는 한달에 30종 이상이 쏟아진다.)

무림에 뜻을 둔 지 37년. 경천동지할 무공으로 천하를 휩쓸고 권황이 되 어 중원을 장악했으나 무뢰배들이 팽배하여 자중지란으로 천지가 혼돈중 에 있었다. 여기에 정수불범하수(井水不犯河水- 우물물은 강물을 침범하 지 않는다. 무협지에서 관(官)과 무림이 대결하지 않음을 비유한 말)의 예를 깬 관맹주(官盟主)의 혈겁이 강호를 둘러싸고 마도(魔道)가 무림을 공격하니, 백발백염(白髮白髥)의 노사부(老師父)가 친히 몸을 일으키나 이미 혈도(穴道)를 제압당해 적의 천파신장(天破神掌)에 피를 토하고 쓰 러져 무림은 파락호(破落戶)가 되고, 무림동자들은 강호를 떠났으니. 구 원(舊怨)을 어이할 건가?

하나 중원 외진 곳에서 혈파십팔검(血波十八劍)을 연마, 동방불패(東方不 敗)를 꿈꾸며 때를 기다리는 협객이 많았으니, 도탄에 빠진 민중들이 그 옛날 협객을 희구하자, 천지를 떠돌던 풍운아들이 야차(夜叉)를 파하고 멸문(滅門)을 일으키려 4대천왕의 뒤를 따라 무림맹(武林盟)을 이뤄 중원 으로 향하는데. 결전의 날은 다가오고, 한바탕 피바람 뒤에 무림의 부활 이 보이나니. 비설연천사백록 소서신협의벽앙(飛雪連天射白鹿 笑書神俠倚 碧鴦: 하늘까지 이어진 눈은 화살처럼 흰 사슴을 쏘아가고, 문사를 비웃 는 신비한 협객이 푸른 원앙에 기대어 있네 )이로다.


대학 도서관 대출 순위 1위 점령

우리나라 무협지의 짧은 역사다(쪽기사 참조). 이땅에 무협지가 뿌리를 내린 60년대 이래, 최근처럼 무협지가 각광을 받은 때는 없었다. 지난해 여러 대학의 도서관 대출순위에 무협소설이 최상위에, 그것도 연이어 올 랐다. 교보문고 등 큰 서점엔 무협지 전문코너가 속속 등장한다. 현재 무 협지는 한달에 30종이 쏟아진다. 하루에 1종씩 나오고 있는 셈이다(한권 이 아니다). 컴퓨터 통신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의 ‘무림동’, ‘무 림천하’ 등에선 무협지와 작가비평이 뜨겁다. 하이텔 ‘무림동’의 경우 회원 1만명, 정기적으로 글을 올리고 있는 회원도 2백~3백명이다.

전통적으로 무협소설을 싫어하는 시사지들도 지난해 10월 `조선일보'를 시초로 11월 `경향신문'이 `위대한 후예'를,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가 경영전략에 관한 1백8개의 이야기를 무협 형식으로 그린 `강호백팔계' 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또 `주간 삼국지'(아이디어 뱅크)가 등장하고, ` 중앙일보'는 지난 3월부터 기자가 직접 쓰는 정치풍자 무협소설 `대권무 림>을 연재했다. 4월에는 무협전문 월간지 `엑스칼리버'(초록배)가 출간 됐다.

만화도 무협만화가 인기다. 얼마전 세상을 떠난 이재학을 필두로 황성, 하승남, 천제황, 황재, 여기에 무협작가이자 만화스토리 작가였던 야설록 의 ‘야설록 프로’ 시리즈 등. 이현세와 허영만이 대본용 만화출간을 중 단하면서, 무협만화는 이제 대본소의 주상품이다. 심지어 황미나, 김혜린 같은 순정만화가들도 `무영여객', `취집맹월'(이상 황미나) `불의 검', ` 비천무'(이상 김혜린) 등 무협만화를 내고 있다. 비디오는 말할 필요도 없다. 무협영화 상영을 꺼려하던 방송국도 최근 `삼국지'가 성인남성들로 부터 높은 지지를 얻자 `동방삼협', `의천도룡기' 등 무협영화를 속속 틀 고 있다.

출판관계자들은 현재 무협지 인구를 대략 3백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연 령층은 중고생에서 40대 이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중 10%는 여성이 다. 무협전문 출판사 `달과 별'의 정우창(39)씨는 “현재 무협지를 펴내 는 출판사는 40여곳이다. A급 출판사는 연 매출액이 40억원에 이르는데 굳이 광고를 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인기를 끌고 있다”고 밝혔다.

한반도가 온통 무림광풍에 휘말린 이유는 뭔가? 무협지가 권선징악과 사 필귀정이라는 우리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으면서 통쾌한 승리, 절세가인 과의 사랑 등 대중소설이 갖춰야할 재미를 고루 갖추고 있다는 점을 먼저 들 수 있다. 여기에 무협지의 작품성이 현대소설에 견줘 손색이 없을 만 큼 향상됐다는 점도 한 요인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현재의 선풍을 설명하기란 뭔가 부족하다. 무협지 활 황은 우리 사회의 그림자를 그대로 드러내주는 거울이다. 무협지에선 선 과 악이 명확하다. 무협지 작가 검궁인씨는 “정치불신이 무협지 부흥의 한 원인이기도 하다. 국민들이 너무 많이 속은 탓에 이야기 구조가 분명 하고,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선이 항상 승리하는) 무협지를 택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적 불만 대리만족 시켜주는 구실

특히 무협지가 최근 신세대들의 열화같은 성원을 받고 있는 이유에 대해 하이텔 무림동 8대 시삽 권지영(24·여)씨는 “무협지는 갑갑한 세상살이 의 청량제 구실을 한다”면서 “사이버공간이라는 ‘무림’의 설정, 판타 지를 도입한 단순구조 등 신세대 정서와 부합하는 측면이 많다”고 설명 했다. 문화평론가 이재현씨는 “무협지는 한마디로 슈퍼맨 이야기다. 자 신의 일상은 초라하고 예쁜 여자도 없고, 힘도 없다. 그런데 무협지는 개 인적, 사회적인 불만을 대리만족 시켜주는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협지가 많이 읽히는 세상, 그만큼 중원에 마(魔)와 사(邪)가 가득하다 는 증거일까? 강호의 도가 떨어진 이 혼탁한 무림, 우린 진짜 영웅을 기 다린다.

권태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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