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정성, 큰 기쁨
1997년05월15일 제 157호 한겨레21

책 빌리는 할아버지의 책 선물

아이 돌보랴, 가게에서 손님 맞으랴, 오늘도 피곤한 하루였다. 자리에 들 어 잠을 청하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오랜만에 책꽂이쪽으로 눈을 돌려본다. 마음을 편하게 해줄 책이 없을까. 그러면 자주색 양장본에 금 장글씨로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라고 쓰여진 책 한권이 눈에 들어온다. 책을 꺼내 손에 드니 곰팡내가 풀풀 피어난다.

오승현(30)씨는 일상에 질려 짜증이 나거나, 다시 한번 자신을 곧추세우 고 싶을 때마다 이 책을 읽는다. 격동의 개화기, 서양문명과 봉건사회가 맞부딪치는 틈새에서 신여성으로 당당히 서고자 했던 최초의 여성 서양화 가 나혜석의 비운의 일대기를 그린 책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책을 만난 사연이 깊다.

그가 문경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하루도 빠짐없이 도 서관에 들러 책을 빌려가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옷차림은 남루하기 짝이 없었다. 깡마른 몸매에 낡은 군복바지를 입고, 넥타이로 허리띠를 삼았다 . 거기에 군복바지보다 더 낡은 남색 점퍼를 입고, 검정고무신을 끌었다. 할아버지의 모습은 어찌보면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기인 같기도 했다.

“철학 사회 역사 종교, 빌려가는 책들이 전문가라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루종일 책만 읽는 것도 아니었죠. 고구마와 땅콩 농사를 지었는데, 농기구를 옆구리에 끼고 10리가 넘는 밭을 매일 걸어다녔으니까요.”

할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모른다. 물어보지도 않았고, 스스로도 얘기한 적도 없었다. 어떤 사람은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광부였다고 하고 , 어떤 사람은 교사였다고 수군댈 뿐이었다. 오씨가 사서직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올 때, 할아버지의 뒷짐진 손에는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는 책이 들려 있었다. 할아버지는 이 책을 선물하게 된 사연을 넌지시 들려 줬다.

“평생 모은 책을 남들에게 다 나눠주고, 죽기 전까지 갖고 있을 만한 10 권의 책을 남겨놓았지. 이 책도 그 가운데 한권이야. 나는 이 책을 읽고 나혜석이라는 인간과 자유주의를 알게 됐어. 그뒤로는 아내며, 딸이며, 며느리에게 했던 이런저런 간섭을 딱 끊어버렸지.”

오씨는 가끔 도서관에 전화를 걸어 지금도 할아버지가 오느냐고 묻는다. 답변은 매양 똑같다. 기쁨의 크기도 똑같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그 남루 한 모습으로 책을 빌려간단다.

이용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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