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1997년05월15일 제 157호 한겨레21

참교육, 마침내 일어나리!

(사진/척추손상과 난청 등의 장애도 교단에 다시 고자 하는 황긍섭 교사(진주고)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동료들이 놀란 토끼눈을 하고 맞는다. 한쪽 에선 머리를 맞대고 수군대기까지 한다. 왜 저러지. 이번엔 교실로 들어 갔다. 학교가 떠나가라 까불대던 아이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쳐다본다. 폭풍전야 같은 침묵에 갑자기 숨이 막힌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꿈이었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다. 침대 시트는 물수건처럼 축축하다. 새벽이면 찾아오는 이 씁쓸한 깨어남. 잠기운이 빠져나가면서 드러나는 현실은 더욱 가혹하다. 배를 한뼘이나 가로지른 상처, 발목을 받쳐주는 금속성 이물질, 병상 옆에 가지런히 서 있는 목발. 그래도 오기를 부리듯 희망을 곱씹는다. 꿈에서나마 교단에 섰으니까.


졸음운전에 갈가리 찢긴 몸과 마음

(사진/몸은 병상을 벗어날 수 없지만 마음은 언제나 교정을 맴돌고 있다. 진주 도동초등학교 교사 박해관씨는 2학기부터 교단에 선다는 기대에 벅차 있다.)

경남 진주 도동초등학교 박해관(33) 교사는 지난해 11월 교통사고를 당했 다. 서울에서 열린 노동법 개정 촉구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오 던 길이었다. 세를 낸 관광버스가 굽잇길을 돌다 넘어지면서 몸이 통째로 차창 밖으로 퉁겨져나갔다. 4번째와 5번째 척추가 어긋났고, 오른쪽 발목 뼈가 무참히 으깨졌다. 배는 한뼘 정도 도려져 살점이 날아갔다. “배의 상처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목숨까지 위태로웠답니다. 의사들이 생명을 건진 것만도 다행으로 여기라고 충고하더군요.”

발목은 온전히 건지지 못했다. 조각난 뼈가 살에 파고들면서 퍼렇게 썩어 들어갔다. 뼈를 일부 들어내고 금속뼈를 댔지만, 상태가 계속 나빠졌다. 급기야 의사는 발목을 모두 잘라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렇지 않으면 오 른쪽 무릎까지 썩어버릴 것이라는 거였다. 하지만 박씨는 필사적으로 버 텼다. 불구가 되는 것이 무서웠고, 그런 모습으로 교단에 서는 것은 더욱 두려웠다. “한달 내내 자를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결국 이겼죠. 오른쪽 다리가 왼쪽보다 짧아지긴 했지만, 치료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민간요법 으로 4~5년 숙성시킨 간장을 하루에 서너 숟가락씩 먹는데, 발목에 제법 살이 붙었어요.”

아이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꼬박꼬박 박씨를 찾는다. 처음에는 목에 깁스 를 한 채 말을 할 수도, 모로 누울 수도, 일어나 앉을 수도 없는 그의 모 습을 보고 펑펑 울기만 했다. 그 다음에는 물끄러미 박씨를 쳐다보다가 힘없이 돌아가곤 했다. 지금은 목발을 빼앗아 장난도 치고, 누가 누구하 고 연애한다는 은밀한 소문까지 들려준다. 일주일마다 봐서 그런지 아이 들이 쑥쑥 크는 것 같다. 그만큼 박씨의 마음은 급해진다. “학교나 주변 에서는 1년 정도 휴직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나 9월부터는 목발을 짚고서 라도 학교에 나갈 작정입니다. 교단에 서고 싶어 병이 덧날 것만 같아요. ”

당시 사고버스에는 전교조 경남지부 진주지회 소속 교사와 가족 47명이 타고 있었다. 박문곤(당시 33세. 삼천포공고) 교사와, 류경렬 교사의 딸 타원(당시 12세)양이 그자리에서 숨졌고, 6~7명의 교사가 팔이 잘리거나 발목뼈가 으깨지는 중상을 입었다. 갈비뼈가 부러진 사람은 그나마 가벼 운 상처를 입은 축에 속했다. 운전사의 졸음운전이 노동자대회를 마치고 귀가하던 이들의 몸을 만신창이로 만든 것이다.


정상인으로 회복 힘든 중상자 수두룩

그날의 상처는 아직 깊고 크다. 딸을 잃은 류경렬 교사는 지금도 말수가 적다. 언제나 조금씩 젖어 있는 눈망울이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한다. 오른쪽 팔을 다친 이귀순(37) 교사(명신고)는 6번의 수술에도, 뼈가 붙지 않아 7번째 수술을 기다리고 있다. 허리를 다친 문가매(34) 교사(진주여 중)는 퇴원은 했지만, 휴직계를 내고 집에서 투병중이다. 그는 요즘도 바 깥 나들이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다. 아버지 이영주(44·지부장·해직교사 )씨를 따라 나섰던 아람(13)이는 얼굴 오른쪽에 기다란 흉터가 남았다. 6 개월 뒤에는 10여명이 성형수술을 받아야 한다.

살아 남았거나, 사고를 피한 가족들의 아픔도 마찬가지다. 숨진 박문곤 교사의 아내 문아무개(32)씨는 남편의 마지막 전화가 늘 마음에 걸린다. 사고 전날 저녁, 박씨는 노동자대회에 참석하겠다고 했다. 평소답지 않게 심각한 표정이었다. “남편이 눈에 띄게 전교조 활동을 한 적은 없었습니 다. 그래서인지 예감이 안 좋았어요. 다른 사람도 많은데 굳이 당신까지 갈 필요가 있냐며 말렸죠. 하지만 남편은 완강했어요. 사고가 난 그날 새 벽, 남편은 저를 깨우지 않고 조용히 방을 빠져 나갔습니다. 저에게 미안 해서 그랬나 봅니다.”

박씨는 서울로 올라가던 도중 휴게소에서 전화를 걸어 몇번이나 “미안하 다”고 했다. 노동자대회를 마치고 진주로 내려오면서도 전화를 걸어왔다 . “여기 천안인데 내려가고 있는 중이야. 곧 갈게, 정말 미안해.” 박씨 의 목소리는 여전히 아내의 뜻을 거스른 미안함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그게 유언이 돼버렸다. “봄만 되면 꽃구경 가자고 아이들을 부추기던 사 람이었어요. 한데, 서울로 올라가기 일주일 전부터 굉장히 바쁘더라구요. 남편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한번도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나중에 돌이켜 보니 그일 때문이었구나 싶어요.”

사고로 중상을 입은 교사들도 무거운 짐을 안고 산다. 그들은 이미 의학 적으로 장애 판정을 받은 상태다. 완전한 정상인으로 돌아가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지팡이와 목발을 짚고 가까스로 학교에 나가지만, 수업시간 이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걸 아이들에게 내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병 원에 몇개월간 입원해 있으면서 아이들에게 진 빚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 다. 속으로 삭이고 감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때로는 짜증이 나기 도 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사라지지 않는 절망감에 짜증 늘어

진주고 정경우(36) 교사는 요즘 부쩍 날카로워진 성격에 스스로 놀랄 때 가 많다. 정씨는 오른쪽 무릎인대 4개 가운데 3개가 끊어졌다. 무릎을 완 전히 굽힐 수도, 완전히 펼 수도 없다. 넉달 동안 병원신세를 지고서야 출근할 수 있었다. “다치기 전처럼 수업을 하고 싶은데 몸이 따라 주지 를 않아요. 3~4시간만 수업하고 나면 그냥 주저앉고 싶어지죠. 5~6시간을 하고 나면 온몸에서 기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짜증이 늘어요. 거울에서 짜증기가 가득한 모습을 보고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

그래서 그는 수업에 들어가기 전, 준비운동처럼 자신의 감정을 점검한다. 행여 삐죽 불거져 나온 신경질에 아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한다. 그게 몸의 불편함보다 고통스럽다. 자청해서 학교에 나왔지만 가끔 휴직하고 싶은 충동마저 생긴다. 그럴 때마다 긴 호흡을 한번 하고 마음을 가다듬 는다. “절망감이야 왜 없겠습니까. 수업 도중 주저앉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러나 포기는 안 합니다. 제가 좋아서 한 일이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으니까요.”

수업을 한다는 것, 그것을 통해 아이들을 만난다는 것은 교사들에겐 그 자체로 기쁨이다. 불편한 몸이 아무리 힘들어도, 팽팽한 신경에 정신이 그토록 피곤해도, 아이들을 보고 나면 힘이 생긴다고 한다. 그러나 조재 순(35) 교사(함양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에게는 어쩌면 영원히 맛보지 못 할 기쁨이다. 오른팔을 잘라낸 그는 1년 동안 휴직계를 낸 상태지만, 1년 뒤 다시 교단에 설 수 있을지는 기약할 수 없다. 아침에 칫솔질을 할 때 마다 오른팔이 사라졌음을 깨닫는다는 그의 쓸쓸한 푸념에 동료들의 가슴 이 미어진다.

교사들은 병원을 나와 처음 학교로 출근하던 날의 기쁨을 보석처럼 간직 한다. 진주고 교사인 황긍섭(38)씨는 넉달 만에 병원신세를 벗어나, 3월 초부터 학교로 출근했다. 등산용 지팡이에 간신히 몸을 맡기고 교문을 들 어설 때였다. 학생들이 우르르 달려와 “고생 많으셨죠”라며 황씨를 에 워쌌다. 손을 잡고, 옷깃을 만지고, 뒤에서 껴안고. 덩치큰 아이들의 어 색한 교태에 황씨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교무실에 들어서자, 이번엔 동료들의 축하가 기다리고 있었다. 환호성을 지르고, 얼싸안고, 어깨를 툭툭 치고. 황씨는 눈물이 핑돌았다. 넉달 동안 비워둔 자리는 그 렇게 따뜻했다.

첫수업 땐 약간 흥분했다. 교실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쏟아진 아이들의 환성과 박수소리에 이미 넋을 빼앗겼다. 수업시간 내내 붉게 상기된 얼굴 로 서 있었다. 어떻게 수업을 마쳤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종소리가 울려 서야 수업이 끝났음을 알았다. 수업이 끝나자 아이들이 미리 준비한 음료 수를 그에게 권했다.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다시 교단에 섰다는 감동으로 산다”

사실, 교단에 선다는 것은 몸을 해치는 일이다. 척추손상으로 오른쪽 다 리가 뻣뻣하게 마비된 그다. 아물기는 했지만, 갈비뼈도 3개 부러졌다. 오른쪽 귀의 고막이 터져 심한 난청과 울림에 시달린다. 병원에서 1년 정 도 더 입원해야 한다고 권유할 정도다. 주위 사람들도 그를 만날 때마다 “휴직하라”는 말을 인사말처럼 꺼낸다. 그때마다 그는 “내몸 상태는 내가 가장 잘 안다. 몸이 더 안 좋아지면 알아서 휴직할 것”이라며 고집 을 피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고집을 피우기가 쉽지 않다. 지팡이에 의존해 1시 간 동안 서 있는 게 꼭 고문같다. 수업이 끝날 때쯤이면 셔츠에 식은땀이 절로 밴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의 양해를 구해 의자에 앉아 수업을 하는 날이 점점 많아진다. 그러나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은 그에게 소중한 행복 이다. “병원에 있으면서 지난 교사생활을 돌이켜 봤습니다. 과연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가르쳤는가, 아이들을 얼마나 이해하려고 노력했는가 말이 죠. 저는 교단을 지킴으로써 그 물음에 답하고자 합니다.”

이용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15일


커버스토리 포커스 문화시대 특집 지난호 전체보기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