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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
1997년05월15일 제 1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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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끝났다. 4패1승. 완패다. 패장의 아픔이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가 슴을 헤집는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왈칵 치솟는다. 정말 최선을 다했는 데. 남이 볼세라 잽싸게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선수들도 비맞은 강아 지처럼 풀이 죽었다. 땀에 젖은 어깨가 한뼘이나 낮아졌다. 코치는 넋이 나갔다. 멍하니 전광판을 바라보는 얼굴에 핏기라곤 없다. 패장의 아픔이 다시 고개를 쳐든다. 라커룸으로 돌아가는 길이 멀기만 하다.
“영광이 언제 우리 편이었나”
최명룡(45) 나래 블루버드 감독은 그렇게 코트를 떠났다. 프로농구 원년 챔피언결정전에서 기아 엔터프라이즈에게 무릎을 꿇던 날, 패장은 그토록 씁쓸했다. 모든 영광과 명예는 오로지 승자의 것이었다. 관중의 환호와 열광, 응원단의 폭죽과 함성, 선수들의 헹가래와 샴페인. 그 화려한 잔치 에 그가 낄 자리는 없었다. 그는 이등이었고, 애초에 영광이란 이등에게 까지 돌아갈 만큼 넉넉한 게 아니었다.
챔피언결정전이 있기까지 그는 작은 신화였다. 실업 시절 무명선수들로 구성된 신생팀 나래를 이끌고 시즌 내내 명문구단을 압도했고, 결국 왕좌 를 넘보기에까지 이르렀다. 프로농구가 시작할 때 그를 비웃던 이들은 슬 며시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러나 그 열풍이 남긴 것은 또하나의 씁쓸함 이었다. ‘사람들은 이등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래서 라커룸에서 선수 들에게 그렇게 외쳤는지 모른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 영광이 언제 우 리 편이었나.”
최명룡은 어쩌면 영광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농구 선수로서, 감독으로 서 그의 일생은 빛보다는 어둠이 길었다. 선수 시절 그는 스타가 아니었 고, 감독이 돼서도 스타를 거느리는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그는 오로지 농구장을 지키는 것으로,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어디 두고보자. 그의 일 생은 두고보자를 다짐하고, 끝내 그걸 보여주는 오기로 일군 삶이었다. 농구공을 처음 잡은 건 중학생 때였다. 덕수중학교에 입학하던 날, 교문 을 지나다 단지 키가 크다는 이유로 농구부 코치의 눈에 들었다. 요즘이 야 그리 큰 키가 아니었지만, 그때만 해도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컸다고 한다. 당장 방과후에 농구부로 끌려갔다. 억지로 시작했지만, 농구란 게 제법 재미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게 코트를 옮겨다니며, 공을 쫓다보면 소년의 몸은 땀으로 흥건했다. 그러나 그 재미도 3개월 만에 끝났다. 가 난한 학교살림 탓에 농구부가 해체된 것이다.
고등학교에 가서야 다시 농구공을 잡았다. 농구부가 해체된 뒤로,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 된 그에게 성동공고에서 스카우트의 손길을 뻗쳐왔다. 중학생 시절, 그의 재능을 떠올린 농구부에서 그를 지목했던 것이다. 소 년은 마술에 걸린 것처럼 코트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랬는지 까닭을 대기 힘들다. 오기 같은 게 아니었나 생각할 뿐이다. 부모가 운동 복을 아궁이에 넣어 불태우면서까지 말렸으나, 소년의 고집을 꺾지는 못 했다.
대학에 갈 무렵, 그는 농구부의 기둥이었다. 밤이면 체육관에 홀로 남아 촛불을 켜고 슛연습을 한 덕이었다. 그의 슛이 터지기 시작하면 상대팀은 견딜 수 없었다. 큰 포물선을 그리는 장거리슛은 그의 강력한 무기였다. 지금으로 치면 3점슛을 펑펑 쏴댄 것이다. 한양대로 진학해서도 그의 슛 은 위력을 잃지 않았다. 한양대는 그의 슛을 타고 농구명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그의 농구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 었다.
스타에 의존 않는 ‘역할 농구’
산업은행 시절은 우울했다. 실업팀이 거의 없다보니, 선택한 길이었지만 농구 할 여건은 지극히 나빴다. 낮 12시까지 은행에서 근무하고, 오후엔 체육관에서 연습을 하는, 어정쩡한 생활이 이어졌다. 다른 은행원들과 똑 같이 치러야 하는 승진시험도 불편했다. 게다가 은행 안에 퍼진 차별도 만만찮았다. 운동선수는 인사에서 고졸사원보다 불이익을 받기 일쑤였다. 선수생활을 포기하는 동료들이 속출했다.
마침 현대와 삼성에서 농구단을 만들면서 실업농구계에 돈바람이 몰아쳤 다. 그 바람에 산업은행도 한순간에 날아갔다. 좀 한다는 선수들은 이들 재벌에서 억대의 연봉으로 싹쓸이해갔다. 금융팀에선 원천적으로 쓸 만한 선수를 구할 수가 없었다. 재벌의 그물에서 벗어난 그렇고 그런 선수들이 고작이었다. 당연히 팀은 만년 하위권을 맴돌았고, 슛쟁이 최명룡은 완전 히 사람들의 관심권에서 사라졌다.
감독이 돼서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작전을 짜도 먹혀들지 않았다. 좋은 선수가 없는 한계였다. 시합에 진 날이면 코 치와 밤새 소줏잔을 기울였다. 지방에서 시합이 있는 날이면 신세가 더욱 처량했다. 상대는 전용버스에 응원단까지 거느리고 위풍당당하게 출전하 는데, 그의 팀은 옹색하기 짝이 없었다. 어느 비오는 날, 경기를 마치고 나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택시를 잡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래는 그런 서러움에서 태어났다. 선수들은 산업은행에서 한솥밥을 먹은 이들이 주축이다. 여기에 합류한 한국은행 출신들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프로농구 출범 직후 아무도 나래의 비상을 점치지 못했던 건 당연했다. 애초에 그들은 버려진 아이들과 비슷했다. 그들에게 붙여진 ‘공포의 외 인구단’이란 별명은 그래서 그럴듯하다. 그들은 무인도의 지옥훈련 못지 않은 서러움의 아픔 속에서 단련됐기 때문이다.
최명룡은 팀워크를 유난히 강조한다. 방앗간의 피대가 톱니바퀴의 연속적 인 물림으로 돌아가듯, 부분이 전체로 발전하는 농구를 추구한다. 이른바 역할 농구다. 선수들은 각자의 역할에 따라 움직이며 조직력을 극대화하 는 것이다. 애초부터 스타에 의존하지 않는 농구다. 사실 그에게 그런 농 구는 낯설다. 선수들에게 큰소리 치는 일도 좀체 없다. 고생할 만큼 했으 니 알아서 할 것이라는 믿음이 그의 작전이라면 작전이다.
파랑새는 다시 날아오른다
최명룡 자신은 예전에 비하면 스타다. 연고지 강원도 원주는 물론이고, 전국에서 그를 알아보는 이가 많다. 이발소에 가면 주인이 “나래 감독 닮았다”고 해 쓴웃음을 짓곤 한다. 양복을 입고 코트를 지휘하다, 관중 들의 환호에 두손을 모아 머리 위에서 흔드는 몸짓도 꽤 그럴싸하다. 하 지만 그는 그런 인기가 함정이란 걸 잘 안다. 더욱이 한번 빛을 본 뒤에 맞은 어둠은 갑절로 가혹하다는 것도. 언제나 시작하는 기분으로 사는 건 그 때문이다.
사진 이정용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