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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하는 재벌 |
1997년05월15일 제 1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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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월28일 채권은행단 회의장에서 기자들에 둘러싸인 장진호 회장. 회생이냐 경영권포기냐의 기로에 놓여 있다.)
‘두꺼비 신화’를 창조한 진로그룹이 3전4기(3轉4起)에 성공할 것인가 ?
진로그룹(회장 장진호)이 최근의 도산위기에서 극적으로 벗어난 것은 전 적으로 정부와 금융기관의 지원 덕분이다. 지난 4월28일 채권금융기관 대 표자회의의 결정에 따라 정상화 추진대상 기업으로 지정된 진로계열 6개 사 가운데 진로쿠어스맥주를 제외한 5개사에게는 5월 초부터 긴급자금 8 백4억원이 지원되기 시작했다. 채권은행들은 또 진로 6개사의 부도 유예 기간을 3개월간(오는 7월27일까지) 연장해 주기로 하고 그동안 신용평가 기관의 분석을 통해 진로의 회생가능성 여부를 판단하기로 했다. 앞으로 3개월간 진로가 부도날 위험은 일단 사라진 것이다. 진로가 발행한 어음 과 수표를 교환에 돌리는 등 긴박하게 움직였던 제2금융권도 지난 4월22 일부터는 진정국면에 들어갔다.
‘경영권 보장’은 조건부 성격
채권은행단의 이런 결정은 한보와 삼미에 이어 진로까지 부도로 쓰러질 경우 초래될 수 있는 금융공황은 일단 막아야 한다는 정부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금융권에서는 진로에 이어 ㄱ그룹과 ㄴ그룹 등 30대 그룹에 속하 는 몇개 대기업이 금융권 지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진로가 안심하기는 아직 이르다. 채권금융기관들의 긴급자금 지원 과 3개월간 부도유예는 진로에게는 일종의 `‘산소호흡기’라고 할 수 있 다. 산소호흡기를 떼면 바로 `‘사망’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채권은행들은 진로그룹의 자구노력을 보장받기 위해 장진호(45) 회장 일 가의 보유주식을 담보로 확보하는 한편 주식포기각서, 주식처분 및 재산 처분 위임장, 장 회장의 진로 계열사에 대한 구상권 포기각서 등 채권확 보서류를 추가로 받았다. 장 회장은 진로 계열사 주식 외에 부동산 등 다 른 재산은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채권은행들은 장 회장의 경 영권은 당분간 보장해 주기로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조건부 성격이다. 신용평가기관의 분석 결과 진로의 회생가능성이 어렵다는 결론이 나오면 장 회장은 경영권을 잃을 수밖에 없다. 진로그룹은 채권은행들의 채권확 보서류 제출 요구가 경영권에 끼칠 영향에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결국 채 권은행들의 요구를 수용했다. 긴급자금의 지원이 채권확보서류 제출과 연 동돼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채권은행들의 도움없이 진로가 자력으로 버티기란 불가능하다. “채권확보서류는 자구계획 이행을 보장하는 각서 성격이다. 경영권에 대해서는 채권은행들과 우리 경영진들이 모두 장 회 장 체제를 유지한다는 데 이견이 없다.” 진로그룹은 신속한 경영 정상화 를 위해서라도 장 회장의 경영권은 보장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채 권은행의 한 고위임원은 “진로는 사실상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말로 향 후 진로그룹의 운명이 매우 유동적임을 분명히 했다.
장 회장의 경영권 유지나 진로의 회생 여부는 진로가 제시한 자구노력이 얼마나 제대로 이뤄지느냐에 달려 있다. 채권은행들의 지원자금은 진로가 요청한 자금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진로는 애초 2천6백75억원의 자금지원 을 요구했다. 그러나 채권은행들은 물품대금이나 하도급대금 결제, 임금 지급 등에 필요한 자금만 지원키로 했다. 설비보수 자금 등 불요불급하다 고 생각되는 부분은 전액 삭감했다.
부동산 매각 순조롭게 이뤄질까
진로는 부도방지협약이 제정되기 전인 지난 4월14일 전격적으로 자구계획 을 발표했다. 한보·삼미 부도사태 이후 자금난이 갈수록 심각해지자 최 후의 단안을 내린 것이다. 진로는 자구계획에서 오는 98년까지 서울 양재 동 화물터미널 부지 등 30여건의 부동산을 매각해 1조1천9백19억원의 자 금을 마련하기로 했다. “자구계획 이행에 별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본다. 팔려고 내놓은 부동산들은 대부분 서울 등 수도권의 요지에 있는 알짜배 기들이다.” 매각대상 부동산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진로유통 임원 은 자신했다. 지난 4월18일 열린 매각대상 부동산에 대한 공개설명회에는 국내 굴지의 유통업체, 건설업체, 부동산 개발업체 등이 대거 참석해 성 황을 이뤘다. 장진호 회장도 요즘에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재벌그룹 총수 들에게 매입 의사를 타진하는 등 발벗고 뛴다. “부동산 매입의사가 있는 기업들에게는 지금이 가장 유리한 시기이다. 우리로서는 여의치 않을 경 우 정부가 부실채권을 정리하기 위해 설립할 예정인 채권정리기구에 넘기 면 된다. 채권정리기구에 넘어가면 매입가 등 매입조건이 지금보다 더 까 다로워질 가능성이 높다.” 진로그룹 김영진 홍보이사의 설명이다.
진로가 내놓은 부동산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곳은 양재동 화물터미널 부 지로 회사쪽에서는 매각예정가를 5천억원 정도로 제시해 놓고 있다. 경부 고속도로 양재인터체인지에 인접해 교통이 편리한 데다 총면적이 2만7천8 백75평에 달해 대형 백화점이나 할인점, 물류센터의 최적지로 꼽힌다. 백 화점을 운영하는 현대그룹의 금강개발과 삼성그룹, 외국계 할인점인 까르 푸 등이 경합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진로그룹 사옥 주변의 서울 서 초동 부지와 아크리스백화점도 알짜배기로 평가된다. 진로 사옥 건너편에 있는 아크리스백화점은 유통업에 대한 진로의 꿈이 담긴 곳으로 영업권을 포함해 매각가가 2천억원대에 이를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진로그룹 사옥 에 인접해 있는 총 1만4천여평 규모의 서초동 부지는 두개로 나뉘어져 있 다. 그 한쪽인 5천8백22평 규모의 버스터미널 부지는 홍콩계 부동산개발 업체인 제스몬드에 1천4백56억원에 팔기로 이미 계약이 됐다. 주상복합건 물이 들어설 예정인 나머지 8천4백72평은 최근 엘지그룹과 1천8백억원에 매매계약 의향서를 작성하는 등 상당한 진척을 보고 있다. 진로종합식품 의 대전, 청주, 김천, 구룡포공장에도 해태, 오뚜기 등 식품업체들이 눈 길을 주고 있다.
진로는 부동산 매각이 순조롭게 이뤄지면 그룹의 재무구조가 획기적으로 개선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부동산 매각대금이 올해 7천5백44억원, 내년에 4천3백75억원씩 들어오면 제2금융권 위주로 금융권 대출금을 상환 해 재무구조와 금융비용 개선에 나설 계획이다. 지난해 말 현재 4.3%에 머물고 있는 자기자본비율을 올해는 13%, 내년에는 24.7%로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진로그룹 한 임원의 설명이다. (주)진로의 주거래은행인 상업은행의 한 관계자는 진로의 부동산 매각예정가가 시가보다 낮게 책정 돼 있어 새 주인을 찾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맥주장사는 대표적 과잉투자였다”
정상화 추진대상 기업으로 선정된 6개 주력기업의 경영이 조속히 흑자로 돌아설 수 있느냐도 관건이다. 진로는 물사업군(소주·맥주·위스키·생 수), 환경사업군(건설·엔지니어링), 유통사업군(유통·베스토아·식품· 하이리빙), 상사 및 첨단사업군(인더스트리즈·플라즈마·G-TV) 등 4대 사업군이 모조리 적자를 냈다.
진로가 위기를 맞게 된 가장 큰 이유로는 우선 능력 이상으로 무분별하게 추진된 과잉투자가 꼽힌다.
“오너의 무모한 과잉투자가 낳은 비극!” 한 민간경제연구소 소장은 장 회장에게 직접 화살을 겨눈다. 장 회장의 선친인 장학엽 창업주가 85년 4 월 타계할 당시 진로는 주류 전문회사로 병제조업체인 진로유리, 주정제 조업체인 진로식품 등을 계열사로 두고 있었다. 주류말고는 의류업체인 ( 주)서광이 유일했다. 장 회장은 나이가 어려 선친 타계 뒤에도 (주)진로 부사장으로 있으면서 사실상 경영의 전면에는 등장하지 않았다. 장 회장 이 취임한 것은 지난 88년 1월 말. 장 회장은 취임과 동시에 제2창업을 선언하면서 진로를 그룹체제로 전환했다. “주류 관련 사업에 치우쳐 있 던 사업구조를 식음료, 유통, 제약, 전선, 금융, 해외사업, 뉴미디어사업 등 다양한 분야로 확대해… 오는 2010년까지 매출액 30조원을 달성하여 국내 10대그룹에 진입하고….” 당시 장 회장이 밝힌 진로그룹의 청사진 이었다. 장 회장은 자신의 호언대로 영토확장을 활발히 벌였다. 80년대 후반에만 진로위스키, 진로종합유통, 청주진로백화점, 진로제약, 진로건 설 등을 새로 인수하거나 설립했다. 90년대 들어 장 회장의 사업확장은 더욱 왕성하게 이어졌다. 진로쿠어스맥주, 편의점업체인 진로베스토아, 진로종합식품, 진로인더스트리즈, 여성전문 케이블 텔레비전인 G-TV, 다 단계 판매회사인 진로하이리빙, 진로지리산샘물 등이 모두 이 기간 동안 새로 식구가 됐다. 장 회장은 90년대 들어 한때 21세기 한국 경제를 주도 할 젊은 경영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과잉투자의 대표적 사례로는 진로쿠어스맥주가 꼽힌다. 대규모 설비투자 가 수반되는 맥주사업에는 지난 3~4년간 4천4백60억원의 거금이 들어갔다 . 그러나 진로쿠어스맥주는 지난해 적자 3백96억원을 포함해 그동안 1천 억원이 넘는 누적적자를 기록하며 심각한 자본잠식 상태에 빠져 있다. 아 크리스백화점으로 대표되는 진로종합유통도 지난해 적자만 7백37억원에 이를 정도로 부실의 수렁에 빠져 있다. 이런 무모한 과잉투자가 낳은 결 과는 비참했다. 지난해 말 현재 진로그룹의 총부채는 3조7천9백44억원으 로 부채비율이 4,287%에 달한다. 연간 금융비용만 3천8백억원.
진로는 외부의 이런 비판에 어느 정도 수긍하면서도 장 회장을 일방적으 로 매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반응이다. “맥주의 경우 지난 94년 하반 기 생산에 들어간 지 3년도 안 돼 국내시장 점유율이 20%를 넘어섰다. 세 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다. 올해부터는 손익분기점에 이른다. 러시아 의 연구인력을 영입해 시작한 진로인더스트리즈는 지난해 말 세계에서 처 음으로 저온 플라즈마 에너지를 상품화하는 데 성공했다. 저온 플라즈마 를 이용한 첨단 의료기기, 에너지 변환장치, 항암제 등을 개발해 올 한해 예상되는 기술로열티 수입만 1천6백만달러에 달하고 오는 2000년에는 2억 달러의 수입이 기대된다.” 진로그룹 김영진 홍보이사는 대다수 재벌그룹 의 재무구조가 안 좋은 점을 감안할 때 진로를 위기에 빠뜨린 진짜 원인 은 한보와 삼미의 연쇄부도, 자금난과 관련된 악성루머, 제2금융권의 무 차별적인 자금회수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올해 매출목표는 지난 해보다 66% 늘어난 3조6천억원이었다.” 올해만 무난히 넘겼으면 안정적 성장이 기대됐다는 것이다.
그룹 창업 이래 네번째 시련
진로는 자금운용면에서도 실패했다. “진로는 상대적으로 보유부동산이 충분하다. 담보가 있으면 제2금융권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다소 금리는 높지만 안정적인 은행신탁대출을 받으면 된다. 그러나 진로는 약간의 금 리부담을 줄이기 위해 전체 대출금의 절반 이상을 제2금융권에 의존했다. 제2금융권은 은행과는 달리 조금만 자금난 조짐이 나타나면 여신회수 등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곳이다.” 진로 채권은행 한 여신담당 간부의 우 호적인 설명이다.
정부와 금융기관의 지원은 진로에게는 새로운 기회이다. 삼미그룹 직원들 은 왜 자신들에게는 진로와 같은 혜택을 주지 않았냐고 장탄식을 하고 있 다. 진로는 지난 24년 창업 이후 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한 파산, 65년 증 류식 소주 생산 금지, 84년과 90년에 걸친 가족간 경영권 분쟁 등 모두 세번의 큰 시련을 이겼다. 이번 사태는 진로그룹으로서는 네번째. 장 회 장으로는 가족간 경영권 분쟁 이후 두번째 맞는 위기이다. 장 회장이 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고 빈사상태의 ‘두꺼비’를 어떻게 일으켜 세 울지 주목된다.
곽정수 기자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