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1997년05월15일 제 157호 한겨레21

이 땅의 운동가들에게

서준식/ 인권운동사랑방 대표

‘문민’ 시대의 두드러진 통치성과 중 하나가 운동의 급속한 ‘체제내화 ’였다.

70, 80년대의 굵직한 ‘좌경분자’들은 어이없게 ‘제도’ 속으로 흡수돼 가거나 또는 ‘민중’ 대신에 ‘시민’을 즐겨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상 업매체들은 때때로 산뜻한 정장 차림의 운동단체 기자회견을 크게 보도했 으며 정무장관실이나 대기업들이 운동을 ‘협찬’하기 시작했다. 요즘 운 동단체들도 이런 현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런 현상은 누가 뭐라 해도 입 밖에 내기가 꺼림칙한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즉 ‘운동의 체 제내화’다.


‘운동의 대중화’는 기만처럼 들린다

원래 운동의 체제내화는 동시에 운동의 ‘계급분화’를 의미한다. ‘현장 ’의 아픔을 자신의 삶 그 자체로 삼는 운동가들, 고집스럽게 ‘민중’을 외치는 운동가들은 여전히 카메라 조명을 받지도 못하고 70, 80년대에 대 중으로부터 획득했던 존경마저 ‘잘 나가는’ 운동단체에 빼앗겨버렸다. 사람들은 이들에게 말한다. “아직도 그런 일을 하고 있느냐?”

“‘운동의 체제내화’가 아니라 ‘변화된 상황에서 운동의 대중화’다” 라는 주장은 나에게 자기기만처럼 들린다. 무슨 상황이 어떻게 변했는지 는 모르지만 운동의 요인은 분명 사라지지 않았으며, ‘민중’이었던 사 람들이 갑자기 ‘시민’이 된 것도 아닐 터이다. 우리 시대는 변함없이 물리적·이데올로기적 계급지배가 관철돼 있으며 국가보안법과 안기부는 지금도 우리의 머리 위를 무쇠솥처럼 짓누르고 있지 않은가? 어느 나라에 내놔도 자랑스러운 70, 80년대 우리 운동을 “닭이 세번 울기 전에” 배 신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 운동의 지향점은 ‘변혁’이요 ‘반체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를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처럼 요즘 우리 운동은 변혁, 진보, 심 지어는 국가보안법이라는 말까지도 “모른다”고 한다. 왜? 감히 나는 말 한다. 그것은 돈의 힘 때문이라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는 기쁨으로 몇몇 사람이 모여 단체를 만든다. 그러나 참으로 두렵고도 두려운 것은, 조직이라는 것은 탄생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자체의 ‘생존논리’를 갖게 된다는 사실이다. ‘해야 할 일(말)’이 도처에서 조직의 생존논리에 제압당할 때 본과 말이 전도되는 현상이 보편화되고 운동은 일종의 대중기만을 감 행하게 된다.

기업이나 정부가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돈을 줄 리 만무다. 그것을 갈등 없이 받는 운동단체는 많지 않다고 믿고 싶지만 ‘가능한 한 자제’하되 받기는 받는다는 분위기는 분명히 일반화돼 있다. 이 돈이 운동을 길들이 게 됨은 명백하다.

가장 건강한 방식이라고 일컬어지는 소액·다수의 회비는 어떤가? 운동의 왜곡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일어난다. 정치권력과 이 사회구조의 대수혜자 인 거대 언론들은 대규모 장비를 통해 자신의 이익에 따라 국민들에게 때 로는 거짓을 보이고 때로는 환상을 보인다. 대중의 후원금에 의존하여 조 직을 유지해나가는 우리가, 아주 어려울 때 대중을 향한 발언 수위를 이 ‘만들어진’ 상식에 일정하게 맞출 수밖에 없음은 분명하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단체와 거부하는 단체 사이의 ‘부익부 빈익빈’은 깊어만 간다.


운동가여, 스스로 고통이 되자

관변단체나 체제 내로 흡수되고자 하는 단체가 아닌 이상 운동단체는 결 국 비참한 재정난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운동의 숙명이요 영광이다 . 일년에 ‘몇억’이라는 활동비 지출, 깨끗하고 넓은 사무실, ‘활동비 ’가 아닌 ‘월급’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활동가…. 이런 것은 일제시대 독립운동에도 없었고 70년대, 80년대 운동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환 상에 지나지 않는다. 불의에 대해 힘을 모을 수 있는 희망의 연대는 단체 간의 ‘규모’ 경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어려움과 금욕 속에서 서로 동지로서 아낄 수 있는 운동 풍토에서만 온다는 군사정권 시절의 벅 찬 경험을 지금 우리는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운동가의 재산은 현실을 넘어서고자 하는 간절한 의지와 꿋꿋한 헌신뿐이 다. 그리고 운동단체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그 시대를 사는 민중들이 진 실을 꿰뚫어보고, 말하고, 힘을 모으기 위한 희망의 물리적 근거로 기능 하는 데 있다. 운동단체에 필요한 것은 결코 ‘규모’가 아니다. 고통에 가득 찬 세계에서 마치 고통이 없는 것 같은 허구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 이려는 손을 뿌리치고 “스스로 고통이 됨으로써 이 세계와 이 세계에서 의 삶을 증언하는 용기”인 것이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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