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1997년05월15일 제 157호 한겨레21

기업엔 ‘지옥의 계절’

 선거가 경제를 어렵게 한다는 주장은 얼핏 상식에 어긋나는 듯 보인다. 오히려 어느 나라에서든 선거를 전후로 해서 경제상황이 일시적으로나마 호전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4년 주기로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미국의 경우, 대통령 선거 바로 전의 해에 주가가 하락한 예는 1943년 이 후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 선거에 맞춰 대통령이 세금을 내리거나 통화량을 늘리는 등의 방법으로 경기부양책을 폈던 것이다.


‘투표 영향’ 물가·땅값은 비교적 안정

경제의 장기적인 흐름을 보면 우리나라의 경우도 크게 예외는 아니다. 민 간경제연구소의 연구결과는 “역대선거에서 선거가 경제 전반의 기조를 바꿔놓을 만큼 큰 영향을 끼친 적은 없다”는 데 결론을 같이한다. 특히 국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물가와 땅값은 선거를 전후로 해 비교적 안정세를 보여왔다.

대우경제연구소가 지난 1월, 80년 이후 치러진 8번의 선거를 대상으로 선 거전후의 경제동향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87년 대선 때를 제외하고는 언 제나 선거직전 또는 선거월에 물가가 내린 것으로 나타났다. 물가는 선거 뒤 일시적으로 오른 적도 있지만 대개는 곧 정상을 회복했다.

80년대 후반 부동산 가격이 급등해 땅값이 중요한 사회적 이슈로 등장한 이후, 정부가 땅값 안정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선거를 전후해 땅값이 크게 오르는 일도 사라졌다.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지난 87년과 그 이듬해 각 각 14%와 21%까지 올랐던 땅값은 92년의 경우 총선과 대선이 같은 해에 치러졌음에도 오히려 1.3%나 떨어졌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다 잘 돼가는 것처럼만 보이는 이런 경제지표들은 천 문학적 규모의 선거자금이 짧은 기간 안에 우리 경제에 파놓는 깊은 주름 살을 지워 없애지는 못한다. 투표에 직접 영향을 주는 물가와 땅값안정에 정부가 힘을 쏟는 동안, 제멋대로 풀린 선거자금은 경제에 보이지 않게 골병을 들게 한다.

신한증권 연구팀이 지난 88년 4월총선, 92년 3월총선, 92년 12월대선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는 선거 전 2~5개월부터 선거 뒤 2~3개월까지의 종 합적인 경기상황이 전반적으로 위축됐음을 보여준다. 경기위축은 선거시 점의 경기가 호황이든 불황이든 마찬가지였다. 이때가 바로 선거자금이 풀렸다 거둬들여지는 기간이다.

오늘날과 같은 천문학적 규모로 선거자금이 불어나기 시작한 것은, 지난 87년 직선으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 때부터다. 정치권에서는 당시 노태우 후보의 선거자금으로만도 최소한 1조원이 이상이 풀렸다는 게 정설로 돼 있다.

지난 92년 대선에서도 각 후보진영은 선거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부 터 정당과 사조직을 중심으로 경쟁이나 하듯이 막대한 규모의 비공식적인 선거자금을 뿌려댔다. 돈을 쓰는 것은 후보자들만이 아니다. 통화당국, 즉 재정경제원과 한국은행도 시중의 자금부족에 따른 국민들의 불만으로 여당 후보의 표가 깎이지 않도록 통화량을 비교적 풍부하게 유지하려 한 다. 이로 인해 지난 92년, 연간 18%대에서 오르내림을 거듭하던 총통화증 가율은 대선을 두달 앞두고 오르기 시작해, 11월에는 19%를 넘어섰다.

선거자금은 주로 현금으로 지출되기 때문에, 소비자금화한다. 이는 소비 지출을 늘려 부분적으로 국내총생산(GDP) 증가에 기여하기도 하지만, 사 람들 사이에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를 조장해 물가를 불안하게 만든다. 지 난 대선기간 동안 줄곧 떨어지던 물가상승률은 선거가 끝난 지 3개월 뒤 결국 되올랐다.


내수도 기대만큼 늘지 않아

무엇보다도 엄청난 돈이 선거자금으로 흘러들어가게 됨에 따라 기업들은 자금확보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지난 92년 대선기간 동안에도 기 업의 대출금증가율은 선거 4개월 전부터 감소했다. 자금사정이 넉넉지 못 한 중소기업들에게는 이때부터 지옥 같은 계절이 시작된다.

선거가 끝나기 전 통화당국이 물가급등에 대비해 시중에 풀린 돈을 서둘 러 거둬들이는 것도 기업의 자금사정을 어렵게 한다. 기업들은 통화당국 의 통화환수로 자금사정이 어려워질 것에 대비해 일단 돈을 당겨놓고 보 자는 심리가 발동하고, 이에 따라 시중금리가 오르게 된다. 역대선거에서 시중금리는 선거 1~2개월 전부터 선거일까지 늘 올랐다.

누가 대권을 쥐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기업주들은 선거기 간 동안 설비투자의 집행을 연기하거나 투자규모를 줄이려는 성향을 보이 는데, 게다가 자금사정마저 어려워지면 설비투자는 더 급격히 감소한다. 기업의 설비투자증가율을 보면, 지난 92년 14대 대통령 선거가 있던 분기 와 다음 분기에 각각 -10.2%와 -12.4%를 기록했다.

선거 기간에 동원되는 엄청난 규모의 인력도 경제에 주름살을 만드는 요 소다. 풍부한 불법선거자금은 선거운동원들에게 지급되는 임금수준을 상 대적으로 높여, 생산부분이나 서비스부분 인력의 상당수를 끌어들인다. 선거운동원의 동원은 근로일수 손실분만큼 제조업 산업생산을 줄여 국내 총생산(GDP) 감소로 이어지고, 선거가 끝난 뒤에는 고용상황을 어렵게 만 든다. 역대 선거기간중 고용동향을 보면, 선거 3개월 전부터 선거 뒤 1개 월까지 제조업체의 입직자에 비해 이직자의 비율이 꾸준히 높아지는 것으 로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선거가 내수판매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역대 선거기간중 도소매 판매액 지수를 보면, 선거 두달 전 정도 까지는 증가세를 유지하다가 선거에 다가갈수록 증가율이 급속히 감소해, 선거 1개월 뒤에야 이전의 증가율 수준을 회복했다. 선거가 내수를 충분 히 진작시킬 수 있는 개연성을 갖고 있음에도 자금시장에 끼치는 부정적 인 영향이 더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내수도 기대만큼 늘어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결국 불법선거자금은 선거기간 동안 우연찮게 돈을 버는 사람의 등장으로 부분적인 부의 재분배효과를 가져오는 것 외에는 경제에 어떤 긍정적 작 용도 하지 못한다. 반면, 손실을 돈으로 따지면 대선자금규모보다 많으면 많았지 결코 적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또 누가 얼마를 풀어놓을까

그런 까닭에 한 중소기업인은 “불법선거자금을 뿌리는 행위는 후보자간 의 불공정경쟁을 낳는다는 점에서뿐 아니라, 국가경제의 흐름을 왜곡시킨 다는 점에서 반국가적인 경제범죄로 단죄하고 청산해야 한다”고 강조한 다.

가뜩이나 경기침체의 최저점에서 치러질 이번 대선에서 누가 또 얼마를 풀어놓을 것인지 국민들의 마음은 벌써부터 착잡하기만 하다.

정남구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5월15일


커버스토리 포커스 문화시대 특집 지난호 전체보기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