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커스 |
1997년04월17일 제 153호
|
|---|
(사진/심재륜 중수부장의 기자간담회. 앞만 보고 나가겠다는 최초의 수사의지가 정치권의 개입으로 흔들리고 있다.)
심재륜 대검 중수부장이 외로워지고 있다.
취임 직후인 지난 3월21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심 중수부장은 “앞만 보 고 나가는 수사를 하겠다”고 수사사령탑으로서 각오를 밝혔다. `‘독이 바짝 오른’ 검찰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한 심 중수부장의 그 말 한마디에 여야 정치권이 꽁꽁 얼어붙었음은 물론이다.
“바깥 분위기가 매우 나쁘다”
심 중수부장은 그날부터 자신의 복안을 거침없이 실천에 옮겨갔다. 전국 의 이름난 수사검사 5명을 대검 중수부 수사팀에 즉각 투입시켰으며, 박 태중씨 계좌수색 영장에 2천억원 리베이트 수수의혹설을 명시함으로써 김 현철씨에 대한 수사착수를 공식화시켰다.
더이상 정태수 총회장의 `‘입’에 매달려 끌려다니는 수사를 하지 않겠 다는 심 중수부장의 의지는 좀더 극적으로 표현됐다. `악덕기업인이 다시 는 재기하지 ‘못하도록’ 정 총회장의 전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전격적으 로 천명하고는, 한보의 경영후계자인 정보근 회장까지 구속시켜버린 것이 다. 심 중수부장의 숨가쁜 수사 행보가 서서히 여론을 주도해가자, 심한 치욕과 낙담에 젖어 있던 검찰 내부에서 “역시 최고의 수사베테랑답다” 는 안도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김현철씨 구속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단지 시간이 문제일 뿐인 듯했다. 1차 한보수사에서 용케도 살아남았던 여야 정치인들 , 그리고 박재윤 전 통상산업부 장관과 한이헌·이석채 전 경제수석도 당 연히 형사처벌의 도마에 오를 것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김영 삼 대통령이 직접 걸려 있는 대선자금 문제까지 심 중수부장팀이 건드리 는 게 아닌가 하는 예측까지 설득력을 갖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4월로 넘어오면서 수상한 반전의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청와 대와 정치권에서 생성된 심상찮은 이상기류가 `‘앞만 보고 나가겠다’는 서초동의 대검 중수부쪽으로 빠르게 접근하는 징후가 하나둘 감지된 것이 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바깥 분위기가 매우 나쁘게 돌아가고 있다”고 심 각하게 걱정했다. 그는 “청와대와 정치권이 쌍수를 들고 김현철씨 수사 방해에 나설 경우 검찰이 얼마나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겠느냐”라고 말 했다. 검찰이 옆길 보지 않고 현철씨 수사를 하겠다고 천명했다지만 그것 도 청와대와 정치권이 최소한 못 본 척 해줄 때나 가능한 이야기라는 것 이다.
정치권의 현철씨 `‘수사방해’는 “한보와 관련해서만 처벌하라”는 다 분히 우회적인 표현으로 제기됐다. 현철씨가 한보사건의 몸통인지를 밝히 면 되는 것이지, 국정개입 의혹 등과 같은 다른 문제로 현철씨를 처벌하 려 해서는 곤란하다는 여권 핵심부의 뜻이 언론을 통해 슬며시 공론화된 것이다.
여권 핵심의 느닷없는 주문은 심재륜 중수부장의 수사방향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것이었다. 심 중수부장은 취임 초 일찌감치 현철씨의 한보 몸통설 에서 국정개입 의혹에 이르기까지 모든 의혹사항을 수사대상으로 삼겠다 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현철씨의 인사개입 사실을 형사처벌하기란 사실 상 불가능하지만, 현철씨의 무소불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그 진상을 국민 에게 알려 검찰의 신뢰를 회복하겠다는 게 심 중수부장의 수사 제1성(聲) 이었다.
대검 중수부 수사팀의 한 관계자는 한발 더 나아가 “한보관련 사안만 수 사하라는 말은 현철씨 형사처벌을 포기하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고 단 언했다. 그는 “현직 대통령 아들인 현철씨가 이권에 개입해 돈을 받았다 는 증거를 찾기가 얼마나 어렵겠느냐”면서 “현철씨 거래설이 나돈 수많 은 기업들 중 한두곳이라도 잡아내면 다행”이라고 말했다.
사실 검찰 수사팀은 현철씨-한보 직접거래의 물증을 찾기란 그 성격상 거 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사안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30위권 밖의 중견 재벌그룹들이 현철씨쪽에 손을 뻗친 흔적이 더 쉽게 잡 힐 것으로 기대하는 분위기였다. 이미 몇몇 중견 그룹에 대해서는 상당 수준까지 내사가 진척된 상태이며, 특히 현 정부 출범 이후 급성장한 이 들 그룹들이 현철씨쪽과 구체적인 이권거래를 했다는 구체적인 자료도 제 법 확보해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수사팀의 또다른 관계자는 “현철씨 수사는 이미 지뢰밭의 한가운데 로 들어섰다”고 표현했다. 현철씨가 정·관·재계 등 도처에 손을 뻗쳐 놓았기 때문에 현철씨 수사를 하다가 언제 대선자금과 같은 ‘`지뢰’를 건드리게 될 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현철씨 주변의 무수한 기업들을 뒤지다 보면 현철씨까지로 이어지는 `‘허점’이 한두개는 드러날 것이라 고 자신하고 있다. 여권 핵심이 한보관련 사안으로 현철씨 수사축소를 주 문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게 검찰 수사팀의 판단인 것이다.
그렇다고 검찰이 일치단결해서 여권 핵심의 주문을 거부할 수 있는 상황 도 아닌 것 같다. 검찰 내에서도 현철씨 형사처벌 이후의 파국을 우려해 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 고위 관계자는 “현철이를 잡아넣으 면 결국 정권 붕괴로 이어지지 않겠느냐”는 ‘국가적 차원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는 “검찰이 살자면 현철이를 처벌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 자니 정권의 앞날이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검찰의 또다른 관계자는 순수한 개인의견임을 전제로 “여야 의원 10여명 을 처벌하는 정도로 끝내면 최선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검찰의 체면 도 살리고 현철씨 문제도 비켜갈 수 있는 타협선을 제시한 것이다. 그 역 시 현철씨를 처벌하려 하다가는 결국 대선자금과 김영삼 대통령에게까지 불통이 뛰는 `‘최악의 사태’가 초래된다는 ‘우국충정론’을 전제로 깔 고 있었다.
‘나라 정치까지 미리 `걱정하는’ 검찰의 굳은 생리가 그렇지 않아도 미 로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현철씨 수사팀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현철씨 수사를 맡고 있는 대검 중수부 중수3과의 걸음은 매우 더 디다. 수사착수 보름이 지나도록 현철씨 직접 수사에는 들어가지도 못했 으며, 현철씨 측근인 박태중씨 계좌와 주변을 뒤지는 데 머물러 있다. 아 직까지 제1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박씨 계좌에서 대선 직후인 93년 초에 1백32억원이 인출되고, 현철씨 재계인맥으로 알려 진 코오롱그룹 이웅렬 회장의 돈이 박씨 계좌에 입금된 사실 등 중요한 단서 몇개 확보하기는 했다.
여야의원 10여명 구속 선에서 타협할 수도
수사팀의 한 관계자는 “박씨 계좌를 추적하는 데만 한달을 잡아야 할 정 도로 수사의 속도가 더디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현철씨 이권청탁 혐의 가 짙은 기업인들은 아예 검찰을 상대하려고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 렵게 얼굴을 맞대도 입을 꽉 다물어 버린다는 것이다.
“상대는 임기가 열달이나 남은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다. 기업인들은 지 금 입을 열었다가는 평생 사업을 망치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결국은 돈을 준 기업인들의 진술을 확보해야 수사가 쉽게 풀려나가는데…. 지금 이 12월 대선이 끝난 뒤라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는 “설사 박씨 계좌에서 대선자금이건 뇌물성자금이건 구린 돈을 찾아 낸다 하더라도 박씨가 `‘내가 덮어쓰겠다’고 하면 거기에서 수사가 끝 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현철씨가 이권에 개입했고 또 그쪽으로 돈이 넘어갔다는 물증을 확보하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고백인 것이다.
그는 “아마 여권 핵심이 이런 사정을 알고 현철씨 수사를 한보관련 사안 에 국한할 것을 요구하는 모양”이라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대검의 다른 소장검사도 “현철씨 비리를 잡으려다 보면 수사의 불똥이 생각지 못했던 곳으로 튈 수 있다”며 “정치권이 지나치게 월권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울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아무리 정치권에서 압박을 가한다 하 더라도 일선 수사팀을 일일이 통제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점에 기대를 걸어 달라”고 말했다.
외로워져가는 ‘심재륜팀’이 어쩔 수 없이 권력실세들과 눈을 맞출 것인 가, 아니면 차제에 `‘권력의 시녀’에서 `‘신뢰받는 검찰’로 대검청사 의 이미지를 바꿔세울 것인지. 앞으로 한달이면 김영삼 정부와 검찰 역사 의 중요한 한 페이지가 기록될 것이다.
김현대 기자/ 한겨레 사회1부
© 한겨레신문사 1997년04월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