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야기
1997년04월17일 제 153호 한겨레21

북한산 송전탑 설치에 ‘파열구’

유황호(39)씨는 요즘 날마다 북한산을 오른다. 봄빛 분분한 자연을 즐기 기 위한 산행은 아니다. 오히려 산에 갔다오면 속이 상한다. 뿌리째 뽑혀 널브러진 나무와 풀들, 그리고 그 옆에 버티고 선 굴삭기. 북한산의 정취 를 깨는 흉물들이 보기 싫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는 ‘북한산국립공 원 송전탑 설치공사 반대 주민위원회’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유씨가 이런 거창한 딱지를 붙이게 된 것은 지난해 3월이었다. “한전에 서 양주변전소~녹양변전소에 송전선을 설치한다며, 북한산 자락에 17개의 철탑을 세우기로 한 겁니다. 조상대대로 내집 정원처럼 아껴온 북한산이 파헤쳐지는 것을 참고 있을 수 없었죠.”

고교를 마친 뒤, 산 아래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며 그저 평범하게 살아오던 유씨는, 그때부터 바빠졌다. 사람들을 모으고, 설득하고, 그렇게 하루하 루를 움직였다. 생업은 아내에게 떠넘겼다. 유씨는 “1년 넘게 살림을 나 몰라라 했더니, 무던한 아내도 요즘엔 툭하면 화를 낸다”며 웃는다.

유씨를 그렇게 내몬 건 정부의 무관심 탓도 컸다. 관공서를 찾아다니며 공사의 부당성을 호소했으나 메아리가 없었다. 송전탑을 굳이 국립공원 안쪽에, 그것도 마을을 가로질러 세우는 까닭을 물었으나, 어느 누구도 책임있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유씨와 주민들은 결국 행동에 나섰다. 굴삭기 삽날에 4시간 가까이 매달려 공사를 저지했던 기억은 지금도 아슬 아슬하다.

유씨를 돕는 사람 가운데는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를 십수년간 뒤쫓아온 권중희(62)씨도 끼어 있다. 지난 92년 텔레비전 다큐멘타리에서 권씨를 본 유씨가 전화번호를 수소문해 연락을 한 게 인연이 됐다. 유씨 는 지난해 5월부터는 농장 축사 한 귀퉁이를 방으로 개조해, 권씨 부부를 모시고 있다. 그는 이 일로 2백만원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권씨는 “유 씨가 얼마나 바쁘게 움직이는지 요즘은 내가 비서 노릇을 한다”고 말한 다.

유씨에게 최근 한가닥 실날 같은 희망이 생겼다. 한전이 북한산 송추계곡 부근에서 벌이고 있는 송전탑 설치공사의 적절성 여부에 대해 국민고충처 리위원회에서 재심에 나선 것이다. 싸움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얻어낸 소 중한 성과다. “이제 희망이 보입니다. 그토록 단단하게 보였던 벽에 작 은 구멍을 낸 셈이죠. 누구보다 북한산 나무들이 좋아할 겁니다.”

정남구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4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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