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1997년04월17일 제 153호 한겨레21

월급쟁이의 서글픈 초상

(사진/자가운전자들도 임금삭감에 따라 공포의 출근전쟁을 치러야 한다. 안정적인 직장이 보장된다면 감수하겠지만 언제 회사로부터 버림받을지도 모른다.)

증권회사 대리로 근무하는 김아무개(32)씨는 요즘 출근가방이 묵직하다. 도시락에 반찬통. 도시락이 얼마나 무겁겠냐마는 어깨에선 힘이 빠진다. 식당에서 사먹는 밥보다야 낫다고 스스로를 달래도 속이 개운치 않다. 점 심시간 사무실에서 도시락을 까먹을 때마다 불황에 허덕이는 월급쟁이 신 세가 처량하다. “회사의 경비절감 방침에 따라 매달 나오던 월차수당 10 만원이 봉급명세서에서 사라졌습니다. 월차가 의무사용 휴가로 바뀐 거죠 . 받을 땐 몰랐는데, 10만원이 크더라구요.”

하지만 그는 이런 사정을 아직 아내에게 털어놓지 못했다. 남편으로서 자 존심이 상하기도 하지만, 아내에게까지 불황의 그늘을 드리우고 싶지 않 아서다. 처음 도시락을 싸달라고 할 때도 “식당밥에 질렸다”고 둘러댔 다. 한달 생활비 1백만원에도 손을 대지 않는다. 그 대신, 스스로 허리띠 를 졸라맸다. “용돈을 30만원에서 20만원으로 줄였습니다. 그 틈을 메우 는 방법은 점심값을 아끼는 길밖에 없더군요. 그동안 지하철과 버스를 탔 으니, 더 줄일 교통비도 없고요.”


줄어든 월급에 점심시간도 두렵다

불황을 사는 월급쟁이들이 고단하다. 경비절감이다, 경쟁력 강화다 하며 기업들이 허리띠를 한구멍씩 죌 때마다, 허리가 움푹움푹 가늘어진다. 똑 똑하다는 친구들은 벌써 제사업을 하겠다며 살길을 틀었다. 무모한 짓이 라고 뒤에서 삐딱하게 본 게 실수였나 싶다. 그렇다고 막차를 타기도 어 줍잖다. 그저 회사가 잘 되기만을 바랄 뿐인데, 돌아가는 판이 심상찮다. 임금동결은 고사하고 삭감까지 공공연하게 이뤄진다. 게다가 인력감축, 조직개편 바람까지 자리를 흔든다.

경기의 흐름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증권가의 체감불황은 더욱 차갑다. 김 씨의 회사는 올해부터 과장급 이상 간부들에게 성과급을 적용하기 시작했 다. 회사는 이들에게 할당된 매매약정액을 채우지 못할 경우 내년 상여금 을 2백% 깎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한다. 김씨는 “올 하반기부터는 대리급 과 평사원들에게도 성과급이 적용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며 고 개를 떨군다.

역시 증권사 대리인 박아무개(33)씨는 최근 아내에게 `가게가 딸린 방을 알아보라고 주문했다. 아내에게 부업을 시켜서라도 생활의 안전판을 마련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만약’에 대비한다. 그 는 얼마 전부터 세무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동료들 가운데도 회사에서 퇴근한 뒤 학원에 들러, 법무사나 공인중계사 시험을 준비하는 이가 부쩍 늘었다고 한다. “월요일 아침이면, 지갑에서 복권을 꺼내 신문의 당첨번 호와 맞춰보는 게 요즘 월급쟁이의 모습입니다. 희극적이면서 비극적이기 도 하지요.”

뭐니뭐니 해도 월급쟁이의 생활을 위협하는 것은 임금동결이다. 전국경제 인연합회는 지난 2월26일 30대그룹 기조실장 회의를 열어, 총액임금을 원 칙적으로 지난해 수준에서 동결하기로 결의했다. 이 결의를 전후로 쌍용 양회, 진로그룹 등 유수한 기업들이 공공연하게 임금동결을 선언했다. 노 동부에 따르면, 4월2일 현재 63개 기업이 임직원 전체 또는 간부급의 임 금을 묶기로 결정했다. 이는 지난해 전체 임금동결 건수 35건을 이미 2배 이상 넘긴 수치다.


임금동결 추세에 따라 부업은 필수

대기업의 자동차 계열사에 근무하는 박아무개(31) 대리는 임금동결의 한 파를 내핍으로 버틴다. 박씨가 일하는 회사는 지난달 이른바 `사원결의대 회를 열어 월급을 동결했다. 박씨도 부인과 머리를 맞대고 결의를 했다. “일단 씀씀이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교통비와 먹는 것, 입는 것에 드는 비용을 아끼자.”

`이에 따라 박씨의 용돈이 15만원에서 10만원으로 줄었다. 평소 통근버스 정류장까지 기본요금을 내고 택시를 탔으나, 지금은 10여분 남짓 걸리는 거리를 걷는다. 가족끼리 외식을 즐기던 여유도 사라졌다. 최소한 2주일 에 한번은 일식집이나 피자집으로 외식을 나갔지만 3월 이후엔 발길을 뚝 끊었다. 중고 승용차를 장만하려던 새해계획도 포기했다. 그렇게 아낀 돈 으로 1천만원짜리 적금에 들었다. “불황이 언제까지 갈지 모르는데 방심 할 수 없습니다. 아들 돌잔치도 간소하게 할 생각입니다.”

임금동결은 조금 아끼고 절약하면 된다. 그러나 조직개편의 회오리바람은 견딜 재간이 없다. 조직개편은 종종 임금동결의 전초전이 되기도 한다. 최근 한 자동차 회사는 각 부서에서 대리와 과장급 2~3명씩을 차출해 일 선 영업소로 돌렸다.

이 회사의 이아무개(34) 대리는 “일선 영업소로 배치된 사원들은 6개월 동안의 영업성과가 안 좋을 경우 `‘대기발령’이 나는 것이 정해진 수순 이다. 한번도 영업을 안 해본 사람들에게, 그것도 불황으로 영업이 될 리 가 만무인 지금 일선 영업소로의 전배는 사실상 해고나 다름없다”고 말 한다.

그러나 아무도 회사의 조직개편에 대해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았다. 자신 이 ‘살생부’에 들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그리고 임금동결 결의대회가 있었다. 모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 래도 잘리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언땅 헤매며 제살깎기식 영업도 감수

관리직 봉급쟁이는 `그나마 임금동결에 그친다. 그러나 불황이 가져온 얼 어붙은 활로를 현장에서 뚫어야 하는 영업사원들은 종종 손해도 감수해야 한다.

한 자동차 회사의 대리점에서 7년 넘게 영업사원으로 근무하는 방아무개( 34) 대리는 요즈음 몸과 마음 모두 파김치같다.

자동차 영업사원이 새차를 판매하면 고객이 갖고 있던 승용차를 중고차 매매시장에 팔아주는 것은 관례처럼 돼 있다. 그리고는 고객에게 새차를 인도하면서 중고승용차의 가격만큼을 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황으로 중 고차 매매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제값 받기가 어려워졌다.

3월 중순께 한 중소기업 사장이 새차를 구입해가면서, 갖고 있던 승용차 를 중고차 시장에 팔아달라고 부탁했다.

방씨는 2백60만원에 승용차를 팔아주기로 했다. 그러나 불황으로 중고자 동차 시장의 매기가 뚝 떨어지면서 실제 시세는 2백만원밖에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60만원은 손해를 감수하기로 했습니다. 불황으로 경쟁회사 자동차 대리 점이 같은 사양의 중고승용차 가격을 시세와 상관없이 2백60만원까지 쳐 주고 있기 때문이죠. 할당된 실적을 채우기가 쉽지 않은 요즘 같은 때 10 만~20만원 차이로 고객을 빼앗길 수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한달 안에 고객의 중고승용차를 팔아줘야 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그렇지 않으면 고객에게 중과세가 부과되기 때문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손님이 의뢰한 중고승용차 처분은 전혀 신경쓸 필요 가 없었죠. 아는 중고승용차 매매업자에게 부탁하거나 지역정보신문에 광 고를 내면 곧바로 팔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매매업자들이 인수 자체를 꺼린다. 불황으로 중고승용차가 팔리지 않고 재고도 쌓여 있기 때문에 보관할 장소가 없다는 것이 그 이 유다. 지역정보신문에 광고도 내봤지만 보름 넘게 문의전화 한번 오지 않 았다. 애가 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골깊은 불황에도 햇빛은 숨어 있다

3월, 4월이면 자동차 구입이 한창일 때다. 그러나 올해는 말 그대로 ``죽 을 썼다고 한다.

우선 고객들이 많이 망설인다. 소위 입질은 많은데 실제로 사는 사람은 없다. 차를 사라고 설득하는데 지난해보다 2배 이상 힘이 든다.

그러나 앉아서 불황을 한탄하기보다는 불황에 맞서 활로를 뚫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영업사원의 몫이다.

방씨도 예외는 아니다. 그도 지난달 자신에게 할당된 실적을 채우지 못했 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할당된 실적을 채운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 이다. 올해 초 한 중소기업 사장과 계약을 성사시켰다가 그 사장이 운영 하는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계약이 취소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감을 잃지 않는다. 점심시간도 잊은 채 고객과 상담하기 바쁘다.

“사실 그동안 호황이라고 너무 안일하게 영업을 했죠. 이제 신규고객을 개척하러 나섭니다. 영업의 참맛을 알게 된 거죠. 언젠가는 음지가 양지 로 바뀔 겁니다.”

이용인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4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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