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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강문 기자의 인물탐험 |
1997년04월17일 제 1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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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이 서른줄에 자기춤을 찾아 나선 그에게선 이제 재능보다 차분함이 느껴진다. 무대를 응시하는 눈 속엔 욕심을 부리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않겠다는 각오가 스친다.)
몸을 꺾는다. 허리째 한껏 뒤로 젖혀간다. 목줄기에 팽팽한 힘줄이 돋는 다. 배꼽 높이에서 갑자기 허리가 사라졌다. 몸은 꼭 기역자다. 허리째 다시 밑으로 떨어진다. 이번엔 좀더 가파르다. 정수리가 발뒤꿈치 어름에 닿는 순간, 삼단같은 머리칼이 바닥에 털썩 깔린다. 몸은 이제 시옷자를 닮았다. 발레리나 한금련(32)의 춤은 대개 이렇다.
체조에 정나미가 떨어진 뒤…
춤이 꼭 예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살기 번뜩이는 검무도 있고, 우스꽝스 러운 병신춤도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이렇게 몸을 꺾는다는 건 생경하다 . 그것도 발레란 이름으로. 더욱이 그는 몸을 심하게 비튼다. 발끝에서 손끝까지 조금씩 꼬여가는 그를 보노라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귀를 대 면 뼈마디가 우드득 하는 소리가 들릴 것 같다.
“몸이 내는 비명을 보여주고 싶어서요. 몸의 가장 치명적인 고통을 전하 는 거죠. 사람들은 그런 고통을 보고나면, 자신의 작은 고통은 잊고 맙니 다.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거죠. 그건 내가 무대에 서는 목적이 기도 하고요.”
그렇게 춤을 추고 나면 몸세포 하나하나가 아프다고 한다. 처음엔 수시로 침방 신세를 졌다. 꺾는 정도를 덜하나 더하나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애초에 자연이 부여한 몸의 구조를 인위적으로 깬 데 대한 업보 같은 것 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걸 마다하지 않는다. 춤이니까. 그 뒤에 남는 아 픔은 일종의 직업병으로 친다.
그는 대학교수 남편과 두 아이를 둔 주부다. 발레리나가 서른 고개를 넘 으면 둘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퇴장이 가까왔거나, 이제 막 자기춤을 추 게 됐거나. 그는 행복하게도 나중에 속한다. 결혼과 출산을 겪은 발레리 나로선 드문 경우다. 더욱이 그 춤이란 게 도무지 상식적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무용계에서 그를 개성파로 내놓는 까닭을 짐작할 법도 하다 .
중학교 때까진 체조를 했다. 지금도 그때의 흔적이 몸에 남아 있다. 철사 로 엮어놓은 듯한 골격과 절도가 밴 팔다리, 그리고 가늘지만 선이 분명 한 몸매. 여성의 굴곡은 숫제 근육 속으로 가라앉았다. “어릴 때부터 몸 을 잘 부렸어요. 텔레비전에서 서커스를 보면 금세 그 동작을 따라하곤 했죠. 올가 코르부튼가 하는 체조선수를 참 좋아했습니다. 백핸드로 공중 제비를 도는 모습에 감탄하곤 했죠.”
초등학교 4학년 때 체조부에 들었다. 천방지축으로 매트를 누볐다. 몸을 돌리고, 접고, 굴리는 데 조금도 두려움이 없었다. 한번은 집에서 이불을 펴고 공중제비를 돌다 크게 다치기도 했다. 서커스 곡예를 흉내낸다며 사 지를 기기묘묘하게 꼬는 놀이도 즐겼다. 요즘 그만한 제자들을 키우다보 니 참 희한한 아이였다고 느낀단다.
체육중학교에 진학해선 호된 훈련을 받았다. 선생님이 재목이다 여겼는지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다그쳤다. ‘백핸드 연속 다섯번씩 몇번’ 식으로 끊임없이 숙제를 냈다. 게으름을 피우다 벌도 많이 섰다고 한다. 그러다 체조에 정을 잃었다. 2학년 때 무용으로 방향을 틀었다. “훈련을 피하다 보니 좋아하는 걸 잊고 말았어요. 정나미가 떨어진거죠. 지금 생각하면 그게 피가 되고 살이 됐지만요.”
“아이 기르는 게 춤보다 어려워요”
이후 펼쳐진 그의 발레수업은 재능있는 이의 성공을 떠올리면 된다. 발레 시간 첫날, 발레의 모든 기본동작을 해낼 정도였다. 마치 장난 같았다고 한다. 몸을 다스리는 데 이골이 난 그에게 춤동작은 숨쉬기 같은 거였다. 서울의 예술고로 진학해서도 능력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최고는 아닐지 라도,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국립발레단까지 가는 길에 어떤 장애물도 없었다.
그의 재능을 한 평론가는 이런 얘기로 전한다. “경쟁의식 때문에 곧잘 신경전을 벌이던 두 작가가 어느날 공교롭게도 회전문 앞에서 만났다. 썩 미인이라 할 수 없는 선배가 순서를 양보하며 말했다. 재능보다 미모. 그 러자 후배가 냉큼 문 안으로 들어가며 맞받아쳤다. 나이보다 재능. 아마 한금련이 그 후배였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그 재능을 아쉬움으로 삭인다. 재능의 마력에 넘어가 춤의 어려움을 방기했던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어릴 때 엉덩이를 집어넣 어라, 아랫배를 당기라는 말만 듣고 쉽게 배운 춤이 본무대에선 통하지 않았다. 자동차처럼 정교해야 할 몸이 달구지처럼 덜그덕거리는 것같았다 고 한다. 국립발레단은 그래서 반성의 무대였다. “그릇도 찰흙이 말랑말 랑할 때 빚어야 합니다. 나중에 고치려고 하면 자칫 부서지고 말죠. 제가 그런 경우였습니다. 이미 굳어버린 것을 허물고, 다시 다듬자니 힘이 곱 절로 들었죠.”
발레가 어렵다는 걸 알게 되면서, 발레가 진짜로 좋아지게 됐다. 국립발 레단에 있던 9년 동안 열심히 춤을 배웠다. 외국인에게 배우고 싶어 선생 님 몰래 대학생들 틈에 끼어 다른 발레단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선생님 의 눈총을 받았지만 스스로 모자란 부분을 채우는 게 먼저였다. 적당히 만족하고, 빈자리를 예술성으로 채우겠다며 자신을 속이기 싫었다. 그렇 게 매년 한계단씩 올라가 6년 만에 국립발레단의 주역이 됐다.
그래도 턱없다는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공을 들이고 들여도 자꾸만 춤 이 기우뚱거렸다. 항아리에 물을 붓고 부어도 밑바닥을 채우지 못하는 것 같은 허무를 느꼈다. 그래서 춤을 떠났다. 결혼하고 아이를 기르며 5년 가까이 무대에서 떨어져 살았다.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거 춤보다 어려 워요. 춤은 안 되면 안 하면 되지만, 아이는 그럴 수 없죠. 포기하지 않 는 데서 맛보는 보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저를 옥죄 던 춤의 굴레를 벗어났어요.”
발레리나에게 출산과 육아는 위기의 성격이 짙다. 특히 육아가 그렇다. 아이냐 춤이냐, 양자택일의 순간을 맞게 마련이다. 만유인력의 법칙과도 같다. 둘 중에 누가 인력이 강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뀐다. 그는 춤으로 끌렸다. 그건 ‘몸의 기미’였다. 내면의 깊은 광기가 머리를 든 것이다. 아직까지 한번도 제대로 태워보지 못한 마음의 심지가 그를 무대로 떼밀 었다.
그는 지난해 예술의 전당이 마련한 ‘우리 시대의 춤꾼’ 무대를 통해 춤 속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의 시선은 무용계에서 거의 잊혀지다시피 했던 이 여자 무용수에게로 쏠렸다. 빠르고, 힘차게 끊어지며, 심하게 굴절되 는 몸의 움직임을 통해 그는 자기만의 춤사위를 보여줬다. 몸을 꺾고 비 틀어 애초의 길로 돌아온 것이다. 그해의 무용연기자상이 그의 그런 복귀 를 반겼다.
이봉주의 마라톤 같은 춤을
그는 무대에서 춤을 추다 엉덩이가 비치면 남몰래 꼭 옷을 매만진다. 시 합 전날 어머니가 돌아가신 걸 알고, 영전에 영광을 바치기 위해 투혼을 발휘했다는 사람들의 신화를 안타까워 한다. 자기라면 시합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집으로 달려갈 거라고 한다. 그게 진정한 프로라고 믿는다. “공연 안 해도 돼요. 사람사는 게 그게 아니죠. 춤에 벌벌 떨 필요없어 요. 중요한 것은 순간의 격함이 아니라 긴 이어짐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이봉주의 마라톤 같은 춤을 추고 싶다. 42.195km는 그가 달려야 할 춤의 길이다. 중간중간 숨이 고비에 닿을 것이다. 몸의 진이 모두 달아나 눕고 싶을 때도 닥칠 것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사람들이 이봉주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감동을 받듯 자신의 고통스런 춤에서 감동받 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는 몸을 꺾고 비튼다.
© 한겨레신문사 1997년04월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