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재
1997년04월17일 제 153호 한겨레21

4월, 그러나 꽃은 무너지고…

우수 경칩이 지나면서부터 그의 얼굴엔 신열이 오른다. 언제고 찾아오리 라던 사랑의 소식이 임박한 듯 창너머 산너머로 한껏 고개를 늘인 채 마 음은 달뜬다.

고대하던 소식은 예외없이 3월 중순께부터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즈음 그의 스크랩에는 막 꽃망울 맺힌 제주도 유채꽃, 동백꽃 붉은 꽃 잎에 물든 여수 오동도 따위의 사진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진해로부터 올 라오는 벚꽃 소식이 전해질 쯤엔 아예 열병든 아이처럼 안절부절 못한다. 봄을 기다리던 텃밭의 진달래와 목련이 정작 붉고 흰 입술을 내밀 즈음, 그는 돌연 창문을 닫아버린다. 두터운 겨울 커튼을 내리쳐 햇살이 스밀 틈조차 없애버린다. 그리고는 깊은 가슴앓이에 빠진다.

봄이 여름에 자리를 넘겨주고 몇 차례 비에 여남은 꽃잎마저 남김없이 쓸 려나갈 때에야 그는 핼쑥한 얼굴로 나타난다. 그리고 언제나 같은 내용의 변명을 늘어놓는다. 정작 꽃망울이 맺힐 때면 시들어 떨어질 꽃들의 참혹 한 모습이 눈에 밟혀 몸을 숨겼노라고. `꽃이란 결실을 위해 스쳐지나가 는 바람같은 것, 꽃이 시든 자리에 비로소 결실이 맺히고 그 결실로 해서 이듬해 꽃들은 더욱 풍성해진다는 것 따위를 모를 리 없지만 그러나 그 여린 꽃잎이 허물어져내릴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동화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앞으로 받게될 상처를 지레 견딜 수 없어 마 음의 문을 꼭꼭 닫아버린 사람들의 여리디 여린 이야기라면 남의 일은 아 니다. 기르던 새나 물고기가 죽고 키우던 화초가 시들어 버린 뒤 일체의 살아있는 것들을 집안에 들이지않는 이웃을 우리는 가끔 본다. 때론 지하 철 안에서 하모니카를 불며 다가서는 장애인 앞에서 눈을 질끈 감아버리 고는 “도대체 정부와 그 많은 사회복지단체들은 어디에 자빠져 있는 거 지”라는 모진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는 이들도 결국 자신의 자그마한 평 온을 지키기 위한 안타까운 노력으로 이해하자.

사랑에는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인지.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상대의 아픔에 마음을 열어놓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그 아픔을 함께 하는 것임 을 우리는 안다. 때문에 거기엔 항상 인내와 고통, 그리고 때론 배반감도 따를 것임을 안다.

사랑이란 것에 눈뜨기 시작한 어린 왕자는 자신의 장미꽃 한송이를 ‘바 로 내 꽃이기에’ 수천 수만의 다른 장미꽃과 바꿀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제야 여우는 그에게 사랑의 비밀을 가르쳐준다. “네가 장미꽃에 바친 시 간과 정성 때문에 그 장미꽃은 그렇게 중요하게 된 거야.”

지금 북한에선 장차 이 땅의 어미가 될 처녀들까지 팔려가고 있다고 한다 . 땅은 풀 한포기 키우지 못하고 아이들은 거리를 떠돌다 죽어가고 또 어 미가 될 처녀는 쌀 몇 바가지에 팔려나간다면, 우리의 반쪽은 정녕 끝장 이다.

닫았던 마음을 열자. 상처를 겁내 이웃의 아픔에 감았던 눈을 뜨자. 그리 고 장롱 깊숙이 감췄던 사랑을 실천하자. 더 굶기면 통일의 정략을 이룰 수 있다는 정부의 무모함, 그 정부를 더는 기댈 수 없어 외국에 지원을 호소하고, 경멸을 감춘 외국인은 한국 정부의 지원을 재촉하는 그런 참담 한 현실에 분노도 해보자.

한겨레21 편집장 곽병찬

© 한겨레신문사 1997년04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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