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1997년04월03일 제 151호

경실련식 시민운동의 파산

(사진/지난 93년 8월 금융실명제 실시를 축하하고 있는 경실련. 김현철 관련 비디오 테이프 절취사건으로 경실련은 최대위기를 맞았다.)

한국 최대의 시민운동단체인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존폐의 위 기를 맞고있다. 김현철씨의 비리의혹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 절취와 그 공 개과정을 둘러싼 의혹으로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고 휘청거리고 있는 것이 다.

구성원 마음의 상처가 더 크다

경실련은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3월18일 유재현 사무총장이 사태의 책임을 지고 전격 사퇴했다. 테이프 절취의 장본인인 부정부패추방운동본부 양대석 사무국장의 사표도 수리됐다. 19일에는 11 명의 대책위원회(위원장 이근식 서울시립대 교수)를 구성하는 한편 부천 경실련 신철영 집행위원장을 사무총장 권한대행으로 임명했다. 경실련은 또 절취의 잘못을 시인하고 조직 재정비를 약속하면서 언론의 포화와 비 난 여론이 잠들기를 기다리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파문은 쉽게 진정되지 않고있다. 여론의 비난은 시간이 지남에 따 라 다소 수그러들었지만 속앓이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상근간사와 실 무자들은 지난 8년 동안 이룩한 성과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됐다는 좌절 감에 휩싸여 있다. 이번 파동을 거치면서 발생한 구성원들 사이의 신뢰 붕괴는 회복불능의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어떻게 함께 일하는 사람 들마저 그렇게 속일 수 있냐”는 배신감으로 핵심 간사들 가운데 몇몇은 아예 사무실에 나오지 않고 있다.

경실련 통일협회 이철규 사무국장은 “물론 조직이 받은 도덕적인 흠집 이상의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 더 큰 문제는 구성원들에게 남 긴 심각한 마음의 상처”라며 “회복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 고 우울해 했다.

이번 파문의 겉모습은 경실련이 테이프를 훔쳤고 이를 은폐했다는 ‘도덕 성 시비’ 형식을 띠고 있다. 하지만 시민운동단체 관계자들은 이런 시비 는 절도와 은폐라는 형식만을 문제삼은 언론의 집중포화에 의한 여론몰이 로 생겨난 곁가지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더 큰 문제는 이번 파문이 경 실련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일부 시민운동단 체와 재야에서는 “뿌리없이 언론의 과대 포장 속에서 성장한 경실련식 시민운동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적신호”라는 극단적인 평가까지 나오고 있다.

지난 89년 7월7일 기존의 정치운동 중심의 사회운동 틀에서 벗어나 ‘대 안있는 시민운동’의 깃발을 내걸고 ‘부동산 투기와 싸우는 시민운동 연 합’으로 소박하게 출범한 경실련의 성장사는 화려하다. 출범 당시 5명에 불과했던 상근간사는 현재 중앙의 65명을 비롯해 전국 2백여명에 이른다. 5백명이던 회원도 2만5천명으로 늘었고 97년 한해 중앙 경실련에서 집행 할 예산만 26억원에 이르는 규모의 살림살이가 됐다. 지난 92년부터 늘기 시작한 지역 조직의 성장은 가히 폭발적이다. 서울 부산 인천 광주 대전 대구 등 6대 도시는 물론이고 지방의 중소도시까지 모두 25개 지역조직에 서 경실련이 공식출범했다. 그리고 태백, 고성, 통영 등 준비위원회 간판 을 내건 곳까지 따지면 현재 모두 37개 지역에서 경실련이 활동하고 있다 . 규모면만으로 보면 한국 최대의 시민운동조직으로 손색이 없다.

“경제 민주 내세운 민중운동과 대립은 잘못”

(사진/땅에 떨어진 도덕성보다 구성원들이 입은 상처가 더 크다. 일부 상근간사들이 배신감으로 출근하지 않고 있어 사무실 공기가 무겁다.)

하지만 이런 외형적인 성공에 대한 다른 시민·사회운동 단체의 평가는 반드시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다. 먼저 이른바 “실사구시의 관점에서” 모든 활동을 바라보며 합법운동을 고집하는 ‘경실련식 운동’에 대한 비 판론이다. 경실련은 89년 출범 당시부터 민중운동과 일정한 선을 긋고 ‘ 시민을 주체로 한 운동’을 표방했다. 민중운동세력에 대해 비판과 차별 화된 태도를 견지하면서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주택임대료 인상규제 입법 운동, 주택임대차 보호법 개정운동, 부동산 투기 해결 등 이슈운동에 집 중해 세력을 확장해 왔다. 하지만 당시 쟁점이던 5공청산, 전교조 탄압, 통일문제 등 민감한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철저 하게 비정치적인 순수 시민운동으로 끝까지 나가겠다”는 게 경실련의 태 도였다.

그러나 서강대 손호철 교수(정치외교학)는 “실현되지도 못한 기본권과 정치적 민주주의 문제에는 침묵하면서 더 상위 단위인 경제적 민주주의를 내세워 민중운동과 대립하며 자신의 영역을 확대해온 것”이라고 비판한 다. 경실련의 이런 성장은 “민주화 실현에 별다른 노력도 없이 명망가 중심으로 민중운동의 성과에 무임승차한 것으로 오히려 민중운동을 무력 화시키기까지 했다”는 게 그의 평가다. 더욱이 ‘철저한 비정치적’ 운 동을 고집하던 경실련은 김영삼 정권의 출범과 함께 경제 영역에 국한되 지 않고 정치, 통일, 환경 등 다양한 분야로 자신의 영역을 확대했다. 그 러나 이런 성장은 시민에 뿌리내리고 시민의 기본권 확장에 천착한 것이 아니라는 비판을 받았다. 오히려 당시 사회적 과제로 등장한 다양한 문제 들에 대해 그때그때 발빠르게 대응하면서 언론의 집중조명만을 노렸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언론이나 사회 주류의 입맛에 맞는 캠페인이나 이슈 중심의 시민운동으로 몸만 부풀려 왔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경실련은 95년 유재현 사무총장의 등장 뒤 이런 체질을 개선하려는 노력 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를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한 것이 조직의 한 계로 지적됐다. 민중운동 진영의 관계자들은 안기부법과 노동법 개악과정 에서 보였던 경실련의 모습이 그 단적인 예라고 본다. 전국연합의 한 관 계자는 “지난 96년 12월20일께 시민사회단체가 안기부법 개악반대 공동 성명을 발표하면서 경실련에 참여자 명단을 요청했지만 실무자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명단을 안 보냈다”며 결국 “시민사회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절박한 문제들을 피하면서 어떻게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시민운 동을 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번 테이프 은폐과정도 “권력에 순응하며 성장해온 경실련의 한계를 드 러낸 것”이라는 게 이들의 평가다.

경실련의 성장에 대한 또다른 비판의 축은 무리한 조직확대와 다른 운동 영역침범에 관련된 것이다. 당초 ‘경제적 부정의와 망국적 불로소득 척 결’을 위한 중산층 운동을 주장하던 경실련은 차츰 노동운동, 학생운동, 통일운동으로 그 영역을 확대해 왔다. 시민·사회운동 세력은 경실련의 이런 태도를 ‘백화점식 운동’ 또는 ‘문어발식 확장’이라고 비판해 왔 다.

경실련식 운동은 시민운동 성장에 걸림돌

사실 경실련의 회원조직과 특별기구들을 살펴보면 손대지 않은 영역이 없 을 정도로 사업이 확대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사업내용은 상근 간사들조차 “꼼꼼히 헤야려 보아야 알 수 있을 정도”라고 말할 지경이 다. ‘청년회’를 중심으로 ‘교통모니터회’‘교통광장’‘문화역사기행 ’‘기독청년협의회’‘대학생회’등 광범한 회원조직이 있다. 또 ‘경제 정의연구소’ ‘환경개발센터’‘통일협회’등 특별기구가 있고 ‘시민의 신문’ 과 영문판 홍보지 ‘Civil Society’, ‘알뜰가게’ ‘영육아보육 사업’ ‘잡지 경제정의’ 등 부설기관이 설치돼 있다. 이밖에도 ‘베트 남 사업위원회’등 6개 위원회가 있다.

하지만 경실련 관계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조직의 확대는 “불가피하다” 는 것이다. 김동규 기획부장은 “조직 생리상 시민의 자발성과 사회적인 다양한 요구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관련 부서가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설명한다. 또 “정부의 다양한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조직 확대 불가피성을 설명하는 또 다른 이유로 제시 했다.

그러나 전국연합 기동민 실장은 “모든 국정에 개입하는 방식의 운동을 고집하는 것은 몇몇 전문가들의 명망성과 경실련의 이름값을 통해 주목받 으려는 것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오히려 이런 경실련의 태도가 건 전한 시민운동의 다양한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고 분석한다. “경실련이 장애인문제, 교통문제 등에 무분별하게 끼어들어 독자적인 정체성과 전문 성을 가지고 성장하는 시민운동세력을 무력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경실련이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생각보다 고유한 전문적 영역 분화를 통해 성장한 다양한 시민단체들과 수평적 연대를 강화하는 방향으 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경실련의 조직확대를 둘러싼 안팎의 평가가 이렇게 엇갈릴지라도 이런 조 직확대가 내부의 민주적인 의사소통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에는 경실련 관 계자들도 대부분 동의하고 있다.

평상시 경실련의 모든 정책을 논의, 결정하는 실질적인 기구는 한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는 상임집행위원회이다. 하지만 조직의 확대로 전체 2백30 명, 보통 80~90명이 모이는 위원회는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때문 에 사무총장, 정책위원장, 조직위원장 등 상집위로부터 위임을 받은 8~9 인 정도의 ‘상임집행실무회의’에서 모든 문제가 결정되고 있다. 결국 다수의 활동가들은 논의에서 배제되고 소수에 의해 모든 사안이 결정되는 게 관례화되었다.

또 국·실장 회의를 통해 부서간의 유기적인 문제 해결을 지향해야 하지 만 사업 규모가 방대해지면서 실제 국·실간에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조 차 알 수 없게 되었다. 경실련의 한 실무자는 “중요한 사안의 경우 국· 실장들조차 모르게 소수의 판단에 모든 것을 맡기게 되며 특히 보안을 요 구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이런 일이 관례화되었다”고 고백한다. 김현철씨 비리 의혹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 확보 문제를 유재현 사무총장과 양대석 사무국장 두 사람만이 알고 있었던 것도 이런 의사결정구조에서 비롯됐다 . 결국 민주적 논의 절차가 가로막히면서 이런 사태가 발생하기에 이르렀 다는 게 경실련 관계자들의 한탄이다.

유재현 사무총장이 지난 3월18일 사퇴하면서 “조직이 너무 방대해지면서 조직내부의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이번 사태가 발생했다” 며 “자원봉사자와 간부 등 구성원들이 논의와 합의를 통해 모든 일을 처 리하는 체제로 전환해야 할 것”이라고 밝힌 것도 이런 문제점을 토로한 것이다.

또 부서간 조직 이기주의로 원칙이 흔들리고 서로의 입장차이를 조율하지 못하는 한계도 드러내고 있다. 지난해 위천공단 설치 문제를 두고 대구 경실련은 ‘찬성’, 부산 경실련은 ‘반대’라는 상반된 태도를 취했지만 중앙은 손을 놓고 있었다.

일부 간부의 정계 진출에도 비판 높아

이 밖에도 경실련 인사의 정치권 진출도 비판의 대상이다. 경실련은 “철 저하게 비정치적인 시민운동으로 끝까지 나아갈 것”을 선언했지만 경실 련 핵심간부들은 정치권으로 줄달음질쳤다. 창립회원이자 집행위원장인 정성철 변호사가 김영삼 정부 출범 뒤 정무1장관실 차관으로 들어갔고 94 년 정책실장이던 정태윤씨가 민자당에 입당했다. 또 95년에는 경실련 정 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박세일 교수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으로 임명 되었고 경실련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았던 이영희 교수는 95년 2월 신한국 당 부설 여의도연구소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유혹이 있어도 출마하 지 않겠다”던 서경석 사무총장은 95년 10월7일 개혁신당에 참여했다.

이들의 잇딴 여당 혹은 비여당 참여는 이번 테이프 은폐사건과 연결돼 더 큰 의혹을 받게 했고 정치적 중립성에 치명상을 입혔다.

시민운동가들로부터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 됐던 경실련은 이렇게 많은 한계를 떠안고 있다. 그리고 이번 파동은 그것을 극명하게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도 경실련의 해체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환경운동연합 정책실 박상철 국장은 “이번 사건은 경실련의 몫만은 아니 다”고 말한다. “규모가 큰 조직은 영향력은 있지만 명확한 전문영역이 확보돼있지 않고 소규모의 전문조직은 자기 정체성과 영향력이 부족한 현 실을 반영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지금 경실련은 분명히 위기다. 하지만 위기는 곧 자기를 돌아보는 기회이 기도 하다. 경실련은 일단 구성원에 대한 재평가와 조직축소 등을 통해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몸부림을 하고 있다. 경실련의 거듭나기는 우 리 시민운동의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시험의 시작일 수 있다.

신승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