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1997년04월03일 제 151호

필요한 것은 ‘수혈’이 아닌 ‘수술’

(사진/우리 산업의 체질을 바꾸기 위한 경제 구조조정에 힘을 쏟겠다고 약속한 새 경제팀의 기자회견. 그러나 넘어야 할 산은 첩첩이다.)

강경식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이 이끄는 새 경제팀은 3월20일 합동기 자회견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이들이 국민 앞에 내놓은 경제위기 탈출처 방은 ‘구조조정’. 국제수지 적자를 개선하고 물가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발등의 불’을 끄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쟁력을 잃어가는 우리 산업의 체질을 개선하는 게 시급하다는 상황인식이 깔려있었다.

시장경제원리가 통하게 하겠다

역대 경제팀들은 늘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힘주어 말해 왔다. 하지만 이번 강경식 경제팀의 경우 구조조정을 중장기적으로 추진할 과제가 아닌 당면 현안으로 파악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구조조정이란 표현은 수요보다 공급이 넘치는 등 수급상 문제 가 있는 업종에 대해 설비와 투자를 줄이는 등의 합리화 조처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강 부총리가 그리고 있는 구조조정은 전반적인 산업 구조, 나아가 우리 경제 전반에 대한 체질을 변화시킨다는, 더 광범위한 것이라는 게 재경원 실무자들의 설명이다.

강 부총리가 경제팀 합동기자회견에서 “우리 경제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본질적으로 경기순환적인 현상과 여러 해에 걸쳐 누적된 구조적 취약성이 복합된 것”이라고 진단하고 “구조조정을 서둘러 당면과제 해결을 통해 정부의 신뢰를 회복하면서 그 토대 위에 `미래지향의 경제 틀을 새로 짜 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같은 인식을 엿보게 한다.

새 경제팀이 내놓을 구조조정의 구체적인 방안을 예측해 보려면 강 부총 리가 기회있을 때마다 펼쳐 온 이른바 ‘새싹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새싹론은 고목에 물과 거름을 주는 노력을 하는 대신 새싹이 자랄 수 있 는 환경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경영이 부실해진 기업에 금융·세제 지원을 쏟아붓기 보다는 우리 경제에 새싹이 될 기술집약적이고 지식중심적인 중소기업들이 활발하게 생성되고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는 뜻이다. 구조조정을 통해 경쟁력 이 떨어지는 산업은 과감히 도태시키고 성장 잠재력이 큰 벤처기업 등 유 망기업의 창업을 촉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면 창의적인 아이디어나 새로운 기술만 있으면 쉽게 창업하여 성공할 수 있는 경제 토양을 만들어 가겠다는 말이다. 강도높은 리스트럭 처링(구조개편) 노력으로 경쟁력 회복에 성공한 미국식 모델을 구조조정 의 귀감으로 삼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강 부총리가 취임 이후 재경원의 각 국·실별로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 서 특별히 강조한 대목이 시장경제원리가 적용되는 경제정책이었다고 한 다. 시장경제로의 구조조정 작업을 계속하겠다는 다짐은 합동기자회견 발 표문에도 앞으로의 경제정책에 있어 세 가지 중점방향의 하나로 들어가 있다.

30대 그룹 출자한도 철폐 가능

강 부총리는 기자회견의 일문일답에서 이와 관련해 대단히 시사적인 언급 을 했다. 민간업계의 자율적 구조조정에 걸림돌이 되는 부분이 있다면 보 완책 마련을 검토하겠다고 밝힌 점이 바로 그것이다. 정부가 염두에 두고 있는 산업구조조정의 제도적 걸림돌이란 대체로 △출자총액 한도 제한 △ 자산매각 등에 대한 양도세 △정리해고제 △여신관리제도 △산업합리화 기준 등인 것으로 보인다.

출자총액 한도제한과 관련된 현행 공정거래법의 규정은 30대 그룹의 경우 계열사 및 타회사 출자한도를 순자산의 25%까지로 억제하는 것으로 돼 있 다. 이에 대해 예외를 인정하는 등의 방식으로 완화해야 민간업계의 자율 적인 인수합병(M&A)을 통한 구조조정이 가능해진다는 게 그동안 업계의 꾸준한 요구였다. 새 경제팀이 이를 수용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해진 다.

그러나 이런 조처는 우리 경제의 재벌구조를 더욱 고착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시장경제 원리만을 강조하기에는 우리 재벌들의 문어 발식 확장 버릇이 전혀 고쳐질 가망이 없는 게 문제라는 얘기다. 재벌 중 심의 경제구조가 우리 경제를 이 지경까지 몰고 온 가장 큰 원인이라는 반성이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당장 한보나 삼미그룹을 인수하는 기업에 대해 이같은 조처를 해 준다면 특혜시비가 일 가능성이 높다.

공장을 매각할 때 부과하던 양도세를 100%를 조세감면규제법 등을 통해 5 0% 정도 감면해 주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기업 에 대한 정부의 보조금 지원을 금지하고 있는 세계무역기구(WTO)의 규정 에 어긋난다. 따라서 금융기관구조개선법이나 중소기업구조개선특별법과 같은 형태의 입법이 추진되고 있다.

민간기업이 인수합병을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동일인 여신한도와 10대 그룹의 총여신 한도에 예외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또 해외차입 등 자금조달원을 다양화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정부가 최 근 국내 외환부족 사태를 해소하기 위해 은행의 중장기 해외차입 한도를 없애고 전면 자유화하겠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할 수 있다. 여신관리를 이처럼 완화할 경우 금융기관 여신의 편중현상이 더욱 심화되 고 따라서 경제력 집중이 가속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지금도 경쟁력이 가장 취약한 분야로 평가되는 금융산업이 금융기관들의 건전성 악화로 더 어려움을 겪게 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산업합리화 조처는 현재 사양산업과 구조적 불황산업으로 한정돼 있지만 이를 구조조정 촉진을 위해 확대하는 것은 또다른 특혜시비를 일으킬 수 도 있어 채택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고비용·저효율’ 해결 위해 각종 규제 완화

강 부총리는 또 정부의 구실과 기능을 재정립하는 차원의 과감한 행정규 제개혁을 추진해 기업의 구조조정을 정부가 선도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 도 했다. 우리 경제의 고질병인 ‘`고비용·저효율’ 문제를 해결하기 위 해서는 과감한 규제철폐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셈이다. 강경식 경제팀은 “규제개혁은 바로 시장경제 만들기”라고 선언했다. 법 대로 하더라도 기업활동에 불편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 규제개혁의 최소한 의 목표라는 점을 덧붙였다. 이를 위해 지금까지 재경원이 맡고 있던 경 제분야 규제개혁 작업을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전담하도록 해 경쟁촉진정책 을 체계화하기로 했다.

그러나 합동기자회견과 그 이후 각 경제부처에서 준비하고 있는 구조조정 방안들은 아직 원론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강 부총리가 취임 직후 “ 경제에는 임기가 없다”고 강조했지만 이는 역으로 현 정부의 임기가 고 작 1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부문별로 구체적인 실천계획을 세우고 추 진하기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라는 고뇌를 읽게 한다. 한보·삼미그룹 부 도에 이어 30대 그룹군에 들어가는 대기업들까지 부도위기에 몰려 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고 있는 마당에 현실성 없는 원칙론을 되뇌고 있을 여 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경원을 필두로 한 경제부처와 함께 경제정책의 또다른 한축이라고 할 수 있는 청와대 경제수석실과의 호흡도 새 경제팀이 해결해야 할 과제로 보인다. 강 부총리와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은 취임 초기부터 미묘한 시 각차를 노출해 왔다.

금융실명제 보완에 대해 강 부총리가 전면적인 보완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추진하고 있는 동안에 김 수석은 찜찜한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우리 경제의 구조조정과 관련해서도 김 수석이 “인수합병 촉진을 위해 출자총액 한도제한을 완화하는 문제 등에는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 력한 것으로 전해져, 강 부총리와는 다소 거리를 보였다.

경제계에서는 강 부총리와 김 수석이 이처럼 구조조정의 실천방안에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은 각자의`경제관이 서로 다르기 때문으로 보고 있 다. 강 부총리는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쪽인데 반해 김 수석은 `공정한 게 임의 법칙이 온전히 서기 전에는 정부의 일정한 구실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산업 구조조정 넘기 어려운 산

이와 함께 금융산업에 대한 구조조정도 어려운 과제로 평가된다. 새 경제 팀이 금융개혁 문제는 일단 금융개혁위원회의 안이 나오면 그것을 토대로 조정에 본격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금개위에 참여하고 있는 금융 계·학계 출신 위원들과 기업 출신 위원들 사이에 견해 차이가 워낙 커 위원회 자체가 표류하는 양상까지 보이고 있다. 이 때문에 실효성 있는 방안이 마련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구조조정에 대한 새 경제팀의 의욕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부도사태와 곧 불어닥칠 대통령선거 바람 속에서도 그대로 지켜져 나름대로의 결실까지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이다.

유상규 기자/ 한겨레 경제부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