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1997년04월03일 제 151호

경실련 파동 시민운동 위상 재검토 하자

(사진/탑골공원에 모여 노동법,안기부법 재개정 시위를 벌이는 시민운동단체 회원들. 취약한 재정과 허약한 조직력 등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3월19일 오전 참여연대에는 팩스가 한장 날아들었다. 그날 아침 `한겨레' 1면에 실린 유재현 경실련 사무총장의 ‘눈물의 사임회견’ 사진을 복사 한 것이었다. 사진 옆에는 2개의 구호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타산지석 (他山之石).’ ‘시민 있는 시민운동을 위하여.’

‘눈물의 사임’ 되풀이 말라

참여연대 한 회원이 보냈다는 그 팩스에는 경실련 파동을 바라보는 시민 운동의 충격과 고민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구호 밑에는 ‘참여와 민주사 회를 위한 시민연대모임’ 상근간사들에게 보내는 격려가 이어진다. “불 철주야 고생하는 상근자 여러분! 우리는 참여연대 박원순 사무처장이 우 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 뒤에는 1천5백명의 회원이 있고 그들이 보내는 성원이 있습니다.”

경실련 파동의 충격은 한국 시민운동의 위상과 방향에 대한 전반적인 재 검토와 토론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폭발력을 지니며 진행되고 있다. 대표 적인 시민운동단체로서 확고한 지위를 유지하던 경실련이 하루아침에 위 상이 흔들리는 위기의 상황까지 몰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한국 시민운 동의 기반이 그만큼 취약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민족민주운동 또는 민중운동으로 불리던 과거의 진 보적 대중운동이 침체의 길을 걷자 그 골을 메우겠다며 나선 것이 이른바 시민운동이었다. 민중운동이 80년대식 운동이었다면, 시민운동은 90년대 를 감당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신사회운동’이라는 말로도 표현되는 시 민운동은 환경·인권·소비자·여성 등을 자신의 주요 활동분야로 정하고 자신의 입지를 넓혀 나갔다.

그러나 90년대 후반기로 접어드는 지금 시민운동은 여러모로 위기에 처해 있다. 민중운동을 제치고 사회변화를 이끄는 주도세력으로 나설 수 있다 는 주장은 지난해말 날치기 노동법으로 일어난 총파업 사태 이후 민주노 총이 강력한 사회운동세력으로 부상하면서 설득력을 잃고 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시민운동 내에서는 시민운동의 사회적 역할, 시민운동과 민 중운동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고민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호소력 있게 퍼 져 나가고 있다.

한국 시민운동의 문제는 ‘시민 없는 시민운동’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시민운동의 주인이 되어야 할 시민의 자발적인 참여와 지지에 근거하지 못하는 운동은 근본적으로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체 성의 위기’가 닥친 셈이다.

취약한 재정과 회원구조는 이런 한계를 가장 잘 드러내준다. 경실련 참여 연대 환경운동연합 등 대표적인 시민운동단체들의 회비납부율은 대략 20~ 40%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한 시민운동가는 “한달에 수백만원으로 안정적 인 할동을 벌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부 시민운동단체가 대기업의 협찬 에 활동비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는 것은 이런 회원구조로는 필연적인 귀 결인지도 모른다”고 털어놨다. 기업의 로비 의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 다는 비판적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권력과 자본에 대해 가장 독립적이어야 할 시민운동이 여러 제약을 받는 것도 역 시 이와 관련이 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것은, 일부 시민운동단체들이 회원 중심의 운영보 다는 언론 홍보를 중심으로 하는 명망가 중심의 활동에 치중한 결과다. 이에 따라 이들은 언론의 구미에 맞는 사업만을 골라 선정적으로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언론에 맞는 상품만을 만들어내는 시민운동은 언론이 외면하는 순간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한 시민운동가는 언론의 관심을 의식하지 않고도 당당히 운동을 펼칠 수 있는 방향으로 운동방식 이 변해야 장기적으로 시민운동이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아직 시민운동단체들은 언론의 눈길을 의식하는 캠페인성 사업방 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규모 센터 건립이나 이벤트성 반짝 사업으로 침체를 벗어나려고 하는 단체들이 여전히 많은 것이다.

확고한 비전과 이념적 지향 마련해야

장기적인 비전의 부재와 이념적 지향이 불명확한 것도 문제다. 경실련은 김영삼 정권이 들어설 때 문민개혁이라는 구호에 묻혀 이를 강화하려는 운동방식을 채택했다.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운동방식만을 고집한 채, 우 리 사회가 처한 민족문제와 민중생존권 문제에는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이런 방식의 운동으로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 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경실련이 문민개혁의 적극적인 보조역을 자부하 다 지금 김현철씨 문제로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

결국 시민운동이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성장해 나가기 위해서는 민중운동 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운동과의 연대 등 새로운 관계 설정이 필요해지고 있다는 지적에 시민운동가들은 귀를 기울여야 할 시점에 이른 것같다.

김창석 기자 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