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1997년04월03일 제 151호 한겨레21

고려원 부도로 출판산업 심각한 위기

국내 최대의 단행본 출판사인 고려원(대표 김낙천)의 부도가 출판계를 강 타하고 있다.

전국 대부분의 서적 도매상 및 주요 소매서점과 거래해온 고려원의 부도 는 한 출판사의 차원을 떠나 경우에 따라 서적 도매상을 비롯 다른 출판 사의 연쇄도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 경우 가뜩이나 불 황의 여파에 시달리는 문화계에서 지식산업의 기본토대 구실을 해온 출판 산업이 심각한 위기에 처할 수 있어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방만한 경영으로 일관해 부실 초래

고려원은 연평균 2백70여종의 단행본 출간, 여러 종의 베스트셀러 보유, 대형 어학교재 출판 등으로 연 매출액 2백억원을 기록해온 명실공히 국내 최대의 출판사다. 대형출판사라지만 연매출액이 1백억원 미만인 민음사 창작과비평사 김영사 등과 비교할 때 단행본 출판시장에서 고려원이 차지 하는 비중은 쉽게 짐작된다. 고려원 창업주인 김낙천씨는 표구·고미술상 을 하다 출판계에 뛰어들어 국내 최대 출판사를 일군 입지전적 인물로, 대외활동을 극히 자제한 채 오직 출판에만 열정을 기울여 온 것으로 알려 져 있다. 그러나 김씨는 백화점식 출판과 무리한 광고비 지출, 출판관행 을 무시한 공격적 영업행위 등으로 동종업계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아왔다 .

사실 고려원은 지난 2~3년간 끊임없는 부도설에 시달려 왔다. 백화점식의 공격적 출판 영업이 출판산업 전반의 불황과 겹쳐 자금회전에 장애를 일 으키면서부터다. 출판업계는 이번 부도의 주원인으로 매년 수십억원에 이 르는 광고비 지출과 불황타개를 위해 시도한 어학교재의 과다투자, 지난 해 시도한 저가 정책의 페이퍼백 출판 실패 등을 꼽고 있다. 고려원은 지 난 3월3일 1차 부도를 낸 뒤 21일 기업은행 인사동 지점에 돌아온 어음 1 0억2천만원을 결제하지 못해 22일 최종 부도 처리됐다.

고려원은 현재 강아무개씨를 사장으로 영입해 사태수습에 나서고 있으나, 회복이 어려울 것으로 알려졌다. 고려원 경영진은 이미 부도를 예상해 ㅇ 그룹 등 출판사를 전신으로 한 기업에 인수를 타진하는 등 제3자인수를 모색했으나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엔 한보그룹과 삼미그룹 부도로 금융권조차 자금지원에 나서길 꺼려 사면초가에 몰려 있는 상태였다.

만약 고려원의 도산이 확정돼 완전히 문을 닫거나 공중분해할 경우 출판 계에 미치는 영향은 심각하다. 그 여파가 도매점에 미칠 경우 대형출판사 조차 자금경색에 시달리는 등 군소출판사의 연쇄도산이 예상된다.

고려원은 그동안 책을 서점에 깐 뒤 사후에 대금을 회수하는 일반적인 위 탁판매 방식이 아니라, 책을 깔면서 동시에 대금을 받는 이른바 ‘밀어내 기식 영업’(어음 선수 방식)으로 영업을 해왔다. 돈을 먼저 주는 것이어 서 서점 도매상은 고려원이 도산할 경우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되지만 그동 안 고려원의 영향력 때문에 울며겨자먹식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영업방식 때문에 고려원의 부도는 곧바로 도매서점의 자금압박으로 이어지고, 이를 보전하기 위해 다른 출판사의 대금지급을 재촉하게 돼 결 국 군소출판사들의 자금경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또 매일 8t 트럭 한대 분량의 고려원 인쇄물량을 담당하던 인쇄, 제본소 의 타격도 출판계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하지만 출판계는 뾰족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고려원 파문이 최소화 하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한 출판관계자는 “대형출판사는 비교적 영향이 적지만, 일부 군소출판사 의 도산이 예상된다. 그러나 출판계 생리상 이에 대한 공동대처는 사실상 어렵다. 영세한 출판사들이 개별적으로 활로를 모색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대한출판문화협회도 3월24일 상임이사회를 열고 고려원 부도 사태를 논의 했지만 이렇다할 구체적 대책을 마련하지는 못했다.


군소출판사도 부도 영향권에 들었다

출협 정종진 사무국장은 “그동안 고려원의 무리한 광고영업, 밀어내기식 영업에 대한 비판이 높았던 상황에서 고려원의 부도에 대안을 찾기는 어 렵다”면서, “다만 출판계 전반에 미칠 악영향을 최소화시키는 방안이 논의됐지만 뾰족한 안이 도출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도서정가제 유지 등 영세한 출판산업을 지탱해줄 수 있는 정부쪽의 제도적 보완책을 기대 할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고려원이 스스로 자구책을 마련하거나, 완전 도산시 그 직접적인 영 향권에서 벗어나는 것은 개별 출판사의 능력 문제로 돌려지고 있는 상황 이다.

이름 밝히기를 꺼려한 한 중견 출판인은 “고려원 부도가 자체의 방만한 경영 탓이지만, 그래도 그 여파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업계 차원의 노력 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못하는 출판계 전반의 상황이 더 문제”라고 지적 했다. 고려원의 부도가 한국 출판업계의 복합적인 부실을 잘 드러내고 있 다는 지적인 것이다.

이인우 기자 한겨레21

© 한겨레신문사 1997년04월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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