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1997년04월03일 제 151호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감독 김응수/출연 김선재,김중기)

최미애/영화평론가

서른살이 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남다른 감회를 불러일으킨다. 어찌 생 각해보면 12월31일과 1월1일이 무슨 차이가 있으며 스물아홉과 서른이라 는 숫자의 사이에 뭐 그리 대단한 벽이 있으랴만은 대개의 사람들은 삼 십대에 접어드는 초입에서 착잡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망연자실해진다. 사람들이 이처럼 서른살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은 누구에게 나 혹독한 시련과 방황과 번민의 나날들로 기억되는 20대의 끝자락을 부 여잡은 상태에서 앞으로 살아가야할 자신의 삶의 형태를 결정지어야 한다 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응수 감독의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는 이른바 80년대 운동권 세대들의 힘겨운 서른맞이에 대한 가슴아픈 기록을 담고 있는 영화이다. 스물아홉 의 마지막날 한때 혁명의 땅을 꿈꾸었던 이들이 눈보라가 몰아치는 모스 크바 근교의 한 별장에 모인다. 이제는 20대에 같은 신념과 희망을 품었 던 사람들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달라져버린 그들은 서로에게 자신 의 일그러진 모습을 투영하며 절망적인 분위기 속으로 가라앉는다.

고문에 못이겨 친구의 이름을 자백했던 과거를 괴로워하며 이제는 연극과 영화 속에서 새로운 비상을 꿈꾸는 중기, 끊임없이 어디론가 달아나려는 중기를 붙잡고자 하는 선재, 아직도 트로츠키를 신봉하는 기웅, 더할 나 위 없는 속물이 되어버린 기웅의 애인 은정, 일찍이 세상과 타협하는 법 을 익혀서 잘 나가는 공무원이 되었지만 스스로의 모습을 혐오하는 성준, 젊은 시절에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논했지만 지금은 전형적인 가정주부가 되어버린 성준의 아내 수진.

영화는 분열되고 파편화된 등장인물들 만큼이나 뚜렷한 내러티브 없이 진 행된다. 그들은 별장 안에 배정된 각자의 방에 갇혀 불현듯 현재의 시간 속으로 찾아드는 과거의 기억 속에 침잠한다. 그리고 그들 사이의 의사소 통은 오로지 사소한 일상사를 가지고 서로를 트집잡는 어이없는 형태로만 이루어진다.

감독과 스탭, 배우 대다수의 자전적 고백을 담고 있는 이 영화는 상업적 인 영화가 관습화시킨 영화만들기의 법칙들을 짐짓 모른 척한다. 카메라 는 오랫동안 한곳에 머물면서 인물들의 내면을 응시하고 별장 안에서 벌 어지는 인물들의 행동과 대사는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기록된다. 이런 형 식은 20대를 마무리하는 송가로 탁월해 보인다. 그러나 지나치게 현재에 대해 절망하며 과거의 모습들을 얼어붙은 기억 속에 가둬두려는 등장인물 들의 강박관념처럼, 영화는 새로운 일상을 살아가려는 이들이 과거의 정 형을 어떻게 현재의 시간 속으로 불러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전망을 제공 하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의 내면의 고민과 갈등을 대변하기에는 아직 충분히 무르익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대사보다 이 영화가 더욱더 관객의 눈길을 끄는 부분 은 러시아의 설원에 안겨 황폐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20대를 반추하는 시 적인 장면들이며,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그들의 방황도 끝나지 않았다. 20대의 신념에 배반당하고 20대의 신념을 배반했던 그들은 앞으로도 한동 안 갈 곳 몰라 허둥대며 그 자리에 그렇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 랜 시간이 흐른 뒤 20대에 알았던 것과는 다른 러시아와 대화하는 법을 익힌 것처럼, 그들은 삼십대가 그들에게 부과하는 새로운 삶과 대화하는 법을 익히게 될 것이다.